절제공 한중손(節制公 韓仲孫 : 世宗 7年(1425)~成宗 22年(1491) 14世)
공은 조선 전기(前期)의 무관(武官)이다. 휘(諱)는 중손(仲孫)이고 일작(一作) 중륜(仲倫)이다. 판서공(判書公 瑞龍)의 둘째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다.
공은 세종(世宗) 9년(1425)에 태어났다. 성품(性稟)은 강개심(慷慨心)에 불타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그리고 효성(孝誠)이 지극하고 충성(忠誠)을 다하였다. 단종(端宗) 원년(145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내자시정(內資寺正) 어모(御侮) 겸 토포사(討捕使)와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하여 선정(善政)으로 특별제수(除授)되어 자헌 대부(資憲大夫) 충청좌우도 절제사(忠淸左右都 節制使)에 올랐으며 성종(成宗) 22년(1491)에 졸하니 67세였다. 공의 오형제(五兄弟)는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니 나라에서는 이를 포상(褒賞)하기 위해 녹곡(祿穀)을 내렸다.
공은 생존(生存)에 권세(權勢)있는 간신(奸臣)들이 권력(權力)으로써 사람을 등용(登用)하니 이를 말리고자 애썼는데 분기(憤氣)에 상(傷)하여 조카인 진산군수 희(珍山郡守 曦)와 창원부사 석(昌原府使 晳), 그리고 셋째 아들인 판윤 질(判尹 질)을 거느리고 전라도 남원 어은동(全羅道 南原 漁隱洞)으로 내려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 고부군 답내면(古阜郡 畓內面 井邑市 梨坪面) 산매리 천태산(山梅里 天台山) 아래로 옮겨 살면서 오직 경서(經書)에 독실(篤實)하였고 은사(隱士)로서 천수(天壽)를 다한 까닭으로 자손들이 이곳에 잉거(仍居)하게 되었다. 아우인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이 젊어서 졸하니 그 식구(食口)들을 극진(極盡)히 도왔음을 세인(世人)들이 칭찬하였다.
아들은 진사 오(進士 晤), 진사 기(進士 耆), 판윤 질(判尹 질), 참봉 소(參奉 昭)이다.
공은 성종(成宗) 22년(1491)에 졸하니 천태산 유좌묘향(天台山 酉坐卯向)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 청주 곽씨(貞夫人 淸州 郭氏)는 사직 적(司直 績)의 따님으로 공묘(公墓)와 쌍조(雙兆)이다.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마멸(廳滅)되어 1983년 춘(春) 3월에 묘비(墓碑)를 개수(改竪)하였는데 방손(傍孫) 한글학자 문학박사 갑수(甲洙)가 글을 짓고 썼다. 영모재(永慕齋)는 1986년 2월 준공(竣工)되고 본당(本堂) 20평, 부속건물 12평에 부지 300평이다.
 
歲享日:음 10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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