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금락당 한경리(琴樂堂 韓璟履 : 純祖 30年(1830) ∼ 光武 7年(1903) 28世)
 공은 효자(孝子)로 자(字)는 도명(道明)이요 호는 금락당(琴樂堂)이다. 증 참판 하경(夏卿)의 아들로 성집공(聖執公 : 元瑞)의 손자이며 만회당 필성(晩晦堂 : 必聖)의 7대손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이니 창손(昌孫)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9살의 어린시절에 아버지를 여의니 그 슬퍼함을 조객(弔客)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으며 성장(成長)하여서도 항상 어릴 때에 아버지를 잃었음을 탄식하면서 어머니를 섬기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그 뜻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명산(名山)에 오직 어머니만이라도 오래오래 살으시기를 기도 하기 무릇 30년에 이르렀다.
 때로는 밖에 맛있는 과일이나 색다른 별미라도 생기면 이를 먹지 아니하고 기어히 가져와 어머니께 드린 다음 맛보고, 또 어머니가 부스럼으로 오래 고생하여 의사가 수술 하여도 낫지 아니 하니 그 부스럼을 입으로 빨아 낫게 하고 어머니 나이 80의 고령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효성이 지극한지라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고종 12년(1875) 어머니가 돌아가게 되자 이 때에도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3일간을 더 살게 하고 마침내 작고하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마다 무덤을 찾아 3년간을 하루같이 성묘하였다.
 이때 마침 개 한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도 항상 공을 따라 무덤길을 왕래한지라 사람들은 그 개만 보면 무덤에 가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 효성이 이러한지라 향청(鄕廳 : 지방관청)에서 누차 효자로 추천하였던바 호군(護軍)의 벼슬을 내리고 광무 7년(1903) 공이 사망하자 본도 관찰사가 왕에게 상소하여 비서원승(秘書院丞)의 벼슬을 내림과 아울러 정려(旌閭)의 은전을 베풀었다,
 공의 효행이 이러하였거니와 아들 남사공 흥교(南史公 : 興敎)도 아버지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한지라 사람들은 효부(孝父)는 효자(孝子)를 낳는다더니 공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하여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배위는 증 숙부인 나주 임씨(羅州 林氏)이니 영진(暎震)의 따님이다.
 아들은 남사공(南史公 : 興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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