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록(現世錄) 

 
차관 한진희(次官 韓眞熙 : 1929∼ , 33世)
공은 전 노동부차관(前 勞動部次官)으로 이름은 진희(眞熙)요 자(字)는 문성(文星)이다. 상구(相救)의 아들이고 양절공(襄節公: 確)의 20대(代)손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공은 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개발을 통한 근대화 과정에서 성장 못지않게 노동(勞動), 사회 문제가 중차대(重且大)함을 인식(認識)하고 그 분야(分野)에 투신(投身)하여 1957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총무부장을 시작으로 유엔한국협회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보건사회부장관 비서관 겸 공보담당관으로 임명(任命)되었으며 1966년 노동청 근로기준과장, 1968년 중앙직업훈련원 훈련부장 1969년 노동보험국장, 1970년 노정국장, 1973년 주 일본국 한국대사관 수석노무관, 1976년 주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대사관 수석 노무관 , 1977년 중앙직업원장, 1978년 노정국장, 1980년 노동청차장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1983년 근로복지공사 사장 등을 거쳐 1985년 노동부차관에 이르고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서울특별시 지하철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34년간을 재직하는 동안 1971년 노정국장당시 제3차 아세아노동부장관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을 때 서울유치는 물론 계획추진, 집행준비 등 완벽을 기하고 13개국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의 노동사정을 각국에 알림으로서 노동외교사에 큰 성과를 거두었고, 1986년 노동부차관 당시 1970년 전후하여 노동계로부터 줄기차게 요구해 오던 최저임금법(最低賃金法)을 제정(制定) 시행(施行)하여 그동안 전혀 보장(保障)되지 않았던 영세근로자에게 최저임금의 혜택이 가도록 함으로서 사회보장정책(社會保障政策)의 발전을 도모(圖謀)하였다. 이밖에 우리 산업사회(産業社會)현장(現場)에서 일어났던 대형(大型)노사분쟁사건(勞使分爭事件)에 직검 뛰어들어 총파업사태(總罷業事態)를 평화적으로 수습 타결한 사례가 많이 있다.
 특히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지하철노조와의 노사관계를 합법(合法) 합리적(合理的)으로 개선하고, 평화적(平和的) 합의(合意) 타결(妥結)하는데 성공하여 정부는 물론 사회 각계 각층으로부터 노사문제 전문가로서의 높은 평가(評價)를 받는등 노동정책(勞動政策)개발(開發)과 행정발전(行政發展)에 크게 기여(寄與)하여 대통령으로부터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을 받은바 있다.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 南氏)로 극률(極律)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1녀를 두니 아들은 동규(東奎)이다. 현재 경총고급인력정보(經總高級人力情報)센타 노동분과위원장(勞動分科委員長), 현대경제연구원 사외이사(現代經濟硏究員 社外理事)에 있으면서 청주한씨중앙종친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고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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