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유항공)(文敬公(柳巷公)
한 수 (韓 脩 : 忠肅王 2年(1333)~禑王 10年(1384) 11世)

公은 고려의 문신이다. 휘(諱)는 수(脩)요 자(字)는 맹운(孟雲)이요 호(號)는 유항(柳巷)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밀직사(密直事)를 지낸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의 아들이며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 사숙공 악(思肅公 渥)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목은 이 색(牧隱 李 穡)과 대귀(對句)하였다. 충목왕(忠穆王) 3년(1347) 이색의 부(父) 이곡(李穀)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공(公 · 脩)을 과거에 뽑으니 15세였고 사람들이 다 놀랐다. 문음(門蔭)으로 진전직별장 (眞殿直別將)을 지내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경전(經典)을 배우고 좌전사한(左傳史漢)을 읽고 초서(草書), 예서(隸書)를 잘 써서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 때 정방 필도치(政房 必도赤)에 임명되고 왕이 손위(遜位 : 임금이 자리를 사양하여 내놓음)하고 강화(江華)로 쫓겨날 때 시종(侍從)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년(1353)전의 주부(典儀 : 主簿)와 필도치가 되고 전리좌랑(典理佐郞), 성균사예(成均司藝), 비서소감(秘書少監), 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지내고 공민왕 10년 (1361)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을 안동(安東)으로 호종(扈從 : 王駕를 모시고 감)하였으며 다음 해 위계(位階)가 중정대부(中正大夫)에 이르렀다.
 이듬 해 환경(還京)한 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 14년(1365) 왕에게 신돈(辛旽)이 바른 사람이 아니니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폄직(貶職 : 職을 낮춤)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쳤으나 신돈의 직언(直言)때문에 임용되지 않았다.
 동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왕은 公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 하여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에 발탁하고 곧 승선(承宣)에 임용됨으로서 전선(銓選)을 관장 하게 하였다. 우왕(禑王) 원년(1375) 밀직제학, 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련한 한 안(韓 安)의 친척이란 이유로 일시 유배(流配)되었으나 동왕 4년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대제학(大堤學)이 되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음 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지고 중대광(重大匡)이 되었다. 우왕(禑王) 9년 (1383)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 宰相)에 이르고 다음 해 졸하니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내려 公의 학식과 행의(行儀)를 세상에서 중(重)히 여겼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여 명나라까지도 이름을 떨쳤으며 왕희지(王羲之 : 晋의 名筆家)를 이었다고 했다. 공의 아들인 출척사(黜陟使) 상질(尙質)이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서 묘지명(墓誌銘)을 받았는데 묘명에 이르기를
“옥병(玉甁)에 넣은 어름처럼 공(公)이 청아(淸雅)하고 먼지 낀 갑(匣)속에 거울처럼 공이 밝다.
 公은 호화롭게 자랐으나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시서(詩書)만 즐겼으며 아무리 적더라도 이곳에는 마음을 끊고 효성(孝誠)과 우애(友愛)와 충성(忠誠)과 신의(信義)와 청렴(淸廉)과 관용(寬容)과 화목(和睦)을 일삼았으므로 의당 수(壽)를 누려야 했을 것인데 하늘이 그만 앗아갔으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아드님들이 재주도 있고 미행(美行)도 있으니 公의 명성(名聲)이 전하여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그 부자의 묘지명을 지으니 어찌 마음이 슬프지 않으랴! 그 여운(餘韻)이 영원히 전하여 자손들이 번창하기 바란다.”
 이는 《고려 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도 실려 있다. 유필(遺筆)로는 노국대장 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회암사지경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신륵사보제전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鍾碑)등은 유명하다. 배위(配位)는 정녕택주 안동 권씨(靜寧宅主 安東 權氏)로 길창부원군 적(吉昌府院君 適)의 따님이며 아들은 부윤공 상환(府尹公 尙桓)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 참판공 상덕(參判公 尙德)이다.
 公은 고려 우왕(高麗 禑王) 10년(1384) 졸(卒)함에 서곡리 세곡자좌(瑞谷里 細谷子坐)에 안장했고 배위 정녕택주 안동 권씨(配位 靜寧宅主 安東 權氏)와 쌍조(雙兆)이다. 시초에 세운 묘비가 퇴훼(頹毁)되었는데 公의 5대손 청백리 효헌공 형윤(淸白吏 孝憲公 亨允)이 약 475년 전에 전향우측(前向右側) 그리고 공의 12대손 금천군수 숙(金川郡守 塾)이 약 290년 전에 전향좌측(前向左側)에 세운 단갈비(短碣碑)가 현존하고 있으며 1993년 청명절(淸明節)에 여섯 자(6尺) 크기의 묘비를 개수(改竪)하였다.
 효헌공(孝憲公 · 亨允 : 副正公 (절)의 아들)은 文襄公 繼美의 손자이며 公의 5대손 으로 중종(中宗) 27년(1532)에 卒했다.
 중종 중기~후기(中期~後期)로 추측(推測)되는 해(약 475년전)에 문경공(文敬公 : 脩)의 묘비(墓碑, 短碣碑)를 전향우측(前向右側)에 초서(草書)로 썼다. 석질(石質)은 화강석(花崗石)이다.
 송월당 숙은(松月堂 : 塾) 五奎의 아들이요 혜(惠)의 손자로 夷襄公(明진)의 9대손이며 公의 12대손으로 숙종(肅宗) 36년(1710) 졸. 금천군수(金川郡守)로 있을 때(約 290年 前) 효헌공 형윤(孝憲公 亨允)이 세운 비의 비문이 마소(磨消) 상태에 이르니 새로 전향좌측(前向左側)에 같은 크기의 단갈비(短碣碑)를 세웠으며 문경공(文敬公 : 脩)의 둘째 아들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의 단갈비도 같은 크기로 같은 연대(年代)에 세웠다. 모두 석질(石質)은 화강석(花崗石)이다.
 고려 재상 문경공 수(高麗 宰相 文敬公 脩)와 배위 정녕택주 안동 권씨(配位 靜寧宅主 安東 權氏)의 묘비를 1993년 청명절(淸明節)에 여섯 자(6尺)크기로 개수(改竪)하였다. 아들 四兄弟 中 둘째 문렬공 상질(文烈公 尙質)은 경신과(庚申科 1382) 3인에 셋째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은 임술과(壬戌科 1382) 3인에 넷째 참판공 상덕(參判公 尙德)은 을축과(乙丑科 1385) 9인에 합격하니 국제(國制)에 따라(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그 모친(母親)은 종신(終身)토록 나라에서 녹(祿)을 주게 되어 있다) 公의 配位를 정녕택주(靜寧宅主)에 봉(封)하고 종신(終身)토록 녹(祿)을 내렸다.
문경공 수(文敬公 脩)의 장인
 
 장인 권 적(權 適)은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삼중대광길창군(三重大匡吉昌君)에 봉(封)해 졌다. 장모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로 그의 부는 추충보절익대공신(推忠保節翊戴功臣)이었는데 유항공(柳巷公 : 文敬公)께서 정당문학예문관제학(政堂大學藝文館提學)때 글씨를 썼다. 공민왕 12년(1363)경
 
원운(原韻)을 차운(次韻)하여 목은 이색(牧隱 李 穡) 선생에게 화답함
 1. 남쪽 변방은 오랑캐와 인접하고 있어
    먼 송경(松京 : 開城)과 소식이 끊기고 있도다.
    저는 살아서 유항(柳巷)으로 돌아왔는데
    어찌 이 몸에 헛 명예가 있기를 바라리요.
 
 2. 보다 기쁜 것은 공께서 우리 이웃에 사시어
    저는 세상을 등지고 당신을 따랐도다.
    우리 마을은 찾아오는 속객(俗客)도 없어
    구름 덮힌 산들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도다.
 
 神勒寺普濟禪尊者 石鍾碑(寶物第229號)
 位置 : 京畿道 驪州郡 北內面 千松里 山282 神勒寺 境內
 
 나옹(懶翁)은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인데 지공(指空) 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 : 수덕을 많이 쌓은 세사람의 승(僧))인데 신라 때의 절(寺)인 신륵사 (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한 나옹 보제존자(普濟尊者)의 묘탑(墓塔)으로서 이 석종(石鍾)을 중심으로 전면에 석등(石燈)이 있고 우측에 탑비(塔碑)가 있어 사역(寺域)의 서 북방 남한강(南漢江)이 굽어 보이는 이 언덕 일대(一帶)가 묘역으로 정해졌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229호)는 고려 우왕(禑王) 5년(1379)에 건립된 것으로 회색의 대리석으로 세워졌는데 목은(牧隱)이 색(李 穡)이 글을 짓고 문경공 수(文敬公 : 柳巷ㆍ脩)가 이 글씨를 썼다.
 
석종비는 나옹대사의 생애와 사상 등의 기록을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하고 문경공(文敬公 韓 脩)이 글씨를 썼는데 높이 1.2m 폭 61cm로 앙연(仰蓮)과 복연안상(覆蓮 眼像)을 새긴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비석이며 두공양식(枓拱樣式)을 새긴 개와(蓋瓦)를 본뜬 옥개석(屋蓋石)을 덮고 있으며 지금도 나옹대사의 묘비문은 선명(鮮明)한 편이다.
 
 양주 천보산(天寶山) 하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15년(1328) 인도(印度)의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부도(浮屠 : 이름난 중 즉 지공대사의 사리나 유품을 안치하여 두는 둥근 돌 탑으로 절 근처에 설치)는 선사(禪師)의 묘탑(墓塔)으로 이의 앞에 절과 선사의 유래를 표상(表象)하는 탑비를 세웠는데 문경공(文敬公 韓 脩)이 글씨를 썼다. 약 600여 년이 지났어도 글씨가 선명함이 특이하다. 화면은 부도가 제일 위에 있고 석등 앞에 탑비가 우뚝 서 있다.
 
 고려 때 유항공(柳巷公 · 韓 脩)은 아우 충간공(忠簡公 · 理)이 광주(光州)에 좌천되었을 때 시(詩)를 지어보냈다.
 보낼 때 일찍이 서리 올까 걱정 했더니 지금 벌써 꽃잎이 반이나 떨어졌네. 하늘가에 소슬히 지내는 자네 어느 때나 모여서 효성(孝誠)을 함께 해볼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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