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참판공 한성우(參判公 韓聖佑:仁祖 11年(1633) ∼ 肅宗 36年(1710) 22世)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자는 여윤(汝尹), 청홍군(淸興君 : 壽遠)의 아들로 청녕군(淸寧君 : 德及)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함평 이씨(咸平 李氏)는 처사공(處士公 : 榮元)의 따님이다.
 우암(尤菴 : 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현종 10년(166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에 천거 되었으나 마치 모독이나 당한 듯 사양 하였다. 동왕 15년 우암등이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되자 수백명의 선비들을 이끌고 소(疏)를 올려 우암이 무고당하였음을 주장하고 충청도에서 숨어 지냈다.
 숙종 6년(1680) 우암 등이 다시 등용된 뒤 숭릉참봉, 봉사, 직장 등을 역임하였다. 동왕 1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랑, 함경도사, 지평, 예빈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동왕 15년 노론(老論)이 몰락하고 우암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갔다.
 동왕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의 세력이 무너지자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수찬, 교리, 응교, 집의. 승지, 병조, 호조참의, 대사간, 판결사, 병조,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회양, 삼척, 철원부사와 광주목사, 전라도관찰사, 개성, 유수 등을 지냈는데 선치수령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광주에서는 공의 덕망(德望)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향년 78세에 졸하니 왕은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이조판서 겸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하였다.
 공은 천자(天姿)가 굳세고 뛰어났으며 어버이를 지효(至孝)로 섬겼다.
 일찍기 말하기를 부모를 모신 사람은 의술을 몰라서는 안된다 하고 의술을 깨쳤으며 상기(喪期 : 상중)에는 여막(廬幕)살이를 하며 풍우(風雨 : 비, 바람)도 피하지 아니하고 조석(朝夕)으로 곡배(哭拜 : 통곡을 하여 성묘함)하였고 말이 선인(先人 :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미치면 오열(嗚咽 : 목이 메어 울음)하고 눈물을 흘림이 늙도록 여전 하였다.
 공은 유학(儒學 : 공자의 가르침을 닦는 학문)을 사모하여 대현(大賢 : 지덕(智德)이 아주 높은 사람)에게 귀의(歸依 : 돌아가 의지함)하였으며 비록 유자(儒者)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 없었고 특히 주자학(朱子學 : 주희(朱喜)가 주장한 유학)에 힘을 쏟아 탐색 연구하여 일생을 두고 체험코자 하였다.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으나 대부분이 산일(散佚 : 흩어져 없어짐) 되었고 증조부인 충정공(忠靖公:應寅)의 유고(遺稿 : 죽은 뒤에 남은 시문의 원고)를 수집(蒐集)하여  백졸재유고(百拙齋遺槁) 를 편집하였으며 공의 연보(年譜)와 유고만이 전하여 온다.
 공은 시조부군(始祖府君)의 묘소(墓所)를 찾는데 크게 힘쓴 분들 중의 한분이다.
 공의 후손들 중에는 문숙공(文肅公 : 翼暮 領議政), 익정공(翼貞公 用龜 領議政), 문간공(文簡公 : 章錫 大堤學)을 위시하여 많은 고위명관(高位名官)과 학자(學子)가 배출(輩出)되었다.   배위 정부인 남양 홍씨(貞夫人 南陽 洪氏)는 감사공(監司公 : 處厚)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을 생하니 장남은 우윤공(右尹公 : 配義)이요 차는 배도(配道) 인데 성거(聖擧)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 되었고 차는 치숙공(致淑公 : 配文)이며 부실(副室)에서 유 1남 하니 창보공(昌甫公 : 配熙)이다.
  位置 : 儀旺市 富谷洞 五峰山
 歲享日 : 陰 10月 첫주 일요일

번호     글 제 목 조회
11 한제세 2015
12 한성우 2035
13 한순 2087
14 한명석 2092
15 한세장 2097
1234567891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