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훈)록(功臣(勳)錄)   
정익공 한준(靖翼公 韓 準 : 1542 ~ 1601 19世)
 공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이다. 공의 휘(諱)는 준(準)이며 자는 공측(公則)이고 호(號)는 남강(南岡)이다. 도정공 수경(都正公 守慶)의 아들이며 적순부위공 진(迪順副尉公 鎭)의 손자이다.
 명종(明宗) 21년(156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禮曹佐郞), 장령(掌令), 좌승지(左承旨),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인성태후(仁聖太后)의 초상에 왕명으로 명정(明旌)을 쓰고 신주(神主)도 쓴 바 있다. 선조 21년(1588)에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안악군수 이 축(李 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연명(連名)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비밀 장계(狀啓)로 올리는데 공이 도왔다. 이 공으로 1590년에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 2등이 되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순화군(順和君)을 호종(扈從)하여 강원도로 피난 갔었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에 전임되었으며 진하 겸 주문사(進賀 兼 奏問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고 1595년 사은 겸 주청사(謝恩 兼 奏請使)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 겸 묘표(禹彦 謙 墓表)를 썼으며 필적으로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선조 34년(1601) 10월 22일 졸하니 예장(禮葬)하고시호(諡號)는 정익(靖翼)으로 내렸으며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했다. 증 의정부 영의정(贈 議政府 領議政)이다.
 평소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졸 후엔 장사(葬事) 치를 돈이 없을 정도의 청백리(淸白吏)였다.
 배위(配位) 정부인 전주 최씨(貞夫人 全州 崔氏)는 도사 정수(都事 貞秀)의 따님이고 아들은 첨지 여숙(僉知 汝淑) 증 승지 여징(贈 承旨 汝徵), 좌랑 여옥(佐郞 汝沃), 정랑 여흡(正郞 汝翕), 증좌승지 여철(贈 左承旨 汝澈), 판서 여직(判書 汝稷), 사과 여제(司果 汝濟), 현감 여형(縣監 汝炯), 첨지 여필(僉知 汝必), 등제 여홍(登第 汝泓)이다.
 공이 선조 34년(1601)에 졸하니 부친인 도정공 수경(都正公 守慶)의 묘 아래에 안장하였다. 6년 앞서 졸한 배 정부인 전주 최씨(配 貞夫人 全州 崔氏)묘와 쌍조(雙兆)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에서 45m 우측하에 세워졌는데 우의정 허 목(右議政 許 穆) 찬(撰)하였다.
 부천시(富川市)의 제3호(1998, 2, 5 指定) 향토유적(鄕土遺蹟)이다.
 位置 : 京畿道 富川市 素砂區 桂壽洞 山3
 歲享日 : 陰 10月 5日.
번호     글 제 목 조회
21 한성시 2141
22 한인보 2141
23 한영서 2142
24 한여기 2143
25 한술 2145
1234567891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