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 한돈원(判書公 韓敦源 : 純祖 20年(1820)~高宗 19年(1882) 28世)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돈원(敦源)이고 자(字)는 공윤(公允)이다. 판서공 진정(判書公 鎭庭)의 아들이고 판서공 치응(判書公 致應)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9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4대손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초계 정씨(貞夫人 草溪 鄭氏) 겸선(謙善)의 따님이다. 공은 순조(純祖) 20년(1820) 12월 27일 생이다.
철종(哲宗) 9년(1858) 정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에 홍문관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고종(高宗) 4년(1867) 성균관 대사성, 1868년 이조참의, 1871년 대거승지 (對擧承旨)를 역임하였다. 아산현감(牙山縣監) 때 송덕비(頌德碑)가 섰고 1872년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부임할 때 성역(城投)을 잘 수행하였다 하여 어사(御史)에 의하여 포장(褒奬)됨으로써 가자(加資)되었고 개성남문(開城南門) 앞에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또한, 유수로서의 치적이 뛰어나 임기가 다 되었으나 송도민이 간청하여 유임되기도 하였다.1873년 정사 이근필(李根弼), 서장관(書狀官) 조우희(趙宇熙)와 함께 부사의 직책으로 중국에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
또한, 1876년에 공조판서에 올랐는데 진하 겸 사은사(陳賀 兼 謝恩使)로 중국에 다녀왔다.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1880년 다시 공조판서로 부임하여 부묘도감제조(부廟都 監提調)를 겸직, 공역(工役)을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었다. 고종(高宗) 19년(1882) 7월 13일 63세로 졸하였다. 만인산(萬人傘)은 지금도 자손이 보존하고 있다.
배위(配位) 정부인 한양 조씨(貞夫人 漢陽 趙氏)는 승지 석구(承旨 錫龜)의 따님이고 정부인 남평 문씨(貞夫人 南平 文氏), 정부인 선산 김씨(貞夫人 善山 金氏)이며 아들은 정자 석동(正字 晳東), 형동(馨東 系崎源后), 승동(承東)이다.
공(公)의 배 정부인 한양 조씨(配 貞夫人 漢陽 趙氏)가 고종(高宗) 14년(1877) 2월 4일 졸함에 부론면 흥호리 월봉계좌(富論面 興湖里 月峰癸坐)에 公과 합조(合兆)되었다.
 
位置 : 江原道 原州市 富論面 興湖里 月峰癸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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