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 한경원(判書公 韓敬源 : 純祖 17年(1817)~高宗 27年(1890) 28世)
공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생부(生父)는 진우(鎭寓)이고 휘(諱)는 경원(敬源), 자(字)는 공수(公授) 호(號)는 유파(柳坡)이다. 현감공 진서(縣監公 鎭序)의 아들이고 참의공 치영(參議公 致永)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9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4대손이다. 순조(純祖) 17년(1817) 11월 5일 생이며 헌종(憲宗) 6년(1840) 진사(進士)되고 이듬해에 제술시(製述試) 표(表) 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나아갔으며 184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46년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발탁된 이후 주로 홍문관 관원으로 일하였다. 철종(哲宗) 9년(1858) 청북 암행어사(淸北 暗行御史) 이건필(李健弼)이 이전에 그의 의주부윤 때의 문제를 조정에 보고하여 죄를 받았다. 고종(高宗) 7년(1870) 진하예방승지(陳賀禮房承旨),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을 두루 거쳤고, 1873년 진하 겸 사은사행(陳賀 兼 謝恩使行)에 정사 이건필과 함께 부사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874년 대사헌, 1875년 이조참판, 1877년에 다시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879년 사은 겸 동지사행에 정사로서 수행하였으며 그뒤 공조판서를 거쳐, 1881년 한성부판윤,대사헌을 지냈다. 또한, 이만손(李晩孫)의 상소내용을 문제삼아 그를 귀양보내는 데에 앞장섰는데, 경기도 유생 신 섭(申 섭) 등이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곤란에 빠지기도 하였다.
1887년에는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에게 아직 체포령이 내려져 있으므로, 그와 내통한 지석영(池錫永), 지운영(池運永)을 국문하도록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과 함께 상소를 올혔다.
고종(高宗) 9년(1872) 주안(奏案)을 임금이 허가하여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부조지전(不조之典 :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의 神主를 永久히 祠堂이나 齋室에서 제사지내게 하던 은전)을 입었다. 공은 고종(高宗) 27년(1890) 6월 1일 74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 진주 유씨(貞夫人 普州 柳氏) 군수 상림(郡守 相林)의 따님이고 정부인 광산 김씨(貞夫人 光山 金氏)는 재구(在九)의 따님이며 정부인 안동 권씨(貞夫人 安東 權氏)는 도정 석윤(都正 錫胤)의 따님이다. 아들은 찬정 기동(贊政 耆東)이다.
공의 배 정부인 진주 유씨(配 貞夫人 晋州 柳氏)는 광무(光武) 7년(1903) 6월 15일에 졸하고 배 정부인 안동 권씨(配 貞夫人 安東 權氏)는 광무 l년(1897) 2월 9일에 졸하니 노림리 율계 곤좌(魯林里 栗溪 坤坐)에 삼합조(三合兆)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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