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공 한계순(襄平公 韓繼純 : 1431~1486 14世)
公의 휘(諱)는 계순(繼純)이요 자(字)는 수옹(粹翁)으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를 지내고 후에 서원부원군 영의정(西原府院君 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청산군(淸山君 惠)의 아들 오형제(五兄弟) 중 막내이다. 조부(祖父)는 조선조 개국공신(朝鮮朝 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휘 상경(諱 尙敬)이다. 公은 나면서 재능(才能)이 뛰어나고 성숙하면서 경사(經史 : 四書三經과 歷史)를 익혀 문음(門蔭 : 선조의 공훈)으로 충의위(忠義衛)에 보(輔)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공조정랑 (工曹正郞)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에 올랐을 때 남이(南怡)의 반란(反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補社秉幾定難翊戴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철권(鐵券)을 내렸으며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청평군(淸平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좌승지(左承旨) 때 예종(睿宗)이 승하(昇遐)하자 성종(成宗)으로 대통(大統)을 잇는데 정희왕후(貞憙王后)를 도왔다. 곧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 : 工曹判書)가 되고 순성명양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겸하였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들어와 인사행정(人事行政)에 조금도 사(私)가 없었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기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이때 나라에서 창경궁(昌慶宮)을 짓는데 公이 선공감도제조(繕工監都提調)로서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마친 공(功)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했다.
公이 성종 병오(成宗 16년 : 1486) 2월에 56세로 졸하니 나라에서는 2일간 조회(朝會)를 걷고 예를 갖추어 양주군 동쪽 금굴리(楊州郡 東便 金掘里(현재의 묘소 위치))에 부인 안동 권씨 (夫人 安東 權氏)와 같은 자리이다. 광(壙)은 따로 예장(禮葬)하고 양평 (襄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公은 長身으로 옥(玉)과 같이 밝고 아름다워서 풍채(風彩)가 준수(俊秀)하며 고관(高官)에 부귀(富貴)를 누렸으되 교만하지 아니 했고 대인(對人)을 극진히 하였으며 모가 나지 않아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公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참판(參判) 김유(金紐)가 지었는데 그 명(銘)가운데 공훈(功勳)을 종(鍾)에 새겨 공(公)의 지위(地位) 더욱 더 높았으나 公의 마음은 더욱 공손하여 사람을 대함에 용납함이 있었으니 장수(長壽) 강녕(康寧)함을 누릴줄 믿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빼앗으니 누가 이를 말리겠는가라고 하였다.
 
公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장은 무과(武科) 급제(及第)하여 상호군(上護軍)을 한 곤(崑)이고 차(次)는 부호군(副護軍) 강(崗)이다.
 
位置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1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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