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군계(西原君系)

 
양해공 한백륜(襄惠公 韓伯倫 : 14世)
 公의 諱는 백륜(伯倫)이요 자(字)는 자후(子厚)이다. 감사공 창(監司公 昌)의 아들이요 찬성공 계복(贊成公 季復)의 손자이다. 公은 어려서부터 비범(非凡 : 뛰어남)하여 경술(經術 : 經書에 관한 학문 또는 統治方法)을 통달(通達)하고 기국(器局 : 재능과 도량)이 크고 활달(豁達)하였다.
 처음에는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온直長同正)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번 전근(轉勤)하여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가 되었다. 성화 무자(成化 戊子 : 1468)에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올랐다. 처음 창릉(昌陵 : 睿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지금 의 王大妃를 선(選)하여 소훈(昭訓)을 삼았는데 이때에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로 책봉(冊封)하고 公은 보국숭록대부 청천군(報國崇祿大夫 淸川君)으로 진계(進階)하고 오위 도총관(五衛 都摠管)까지 겸하였다.
 이윽고 역당(逆黨)이 일어 난(亂)을 일으키거늘 公이 左右에서 힘을 다하여 제거(除 去)하니 이로 인(因)하야 익대공선(翼戴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고 기축(己丑 : 1469년)에 대광(大匡)을 더하고 겨울에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今上께서 대통(大統)을 입계(入繼)하고 王大妃를 높여 母后로 삼고 公의 대우(待遇)를 더욱 후(厚)하게 했다. 경인(庚寅 : 1470)년에는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에 제수되고 경연(經筵)도 公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게하였다. 신묘(辛卯 :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下賜)받고 겨울에는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리고 甲午(1475)년 5月 丁亥日에 병(病)으로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8이라.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애통해하여 조회를 파하고 누차 내신을 보내 사제(賜祭)를 하고 부의(賻儀)를 등(等)에 넘게 했으며 장례(葬禮)는 외조고(外祖考)를 대우(待遇)하던 고례(故例)대로 하고 시호(論號)를 양혜(襄惠)라고 했다.
 公은 관후(寬厚)하고 화평(和平)하여 늘 선세(先世)의 미덕(美德)을 계승하였고 몸이 국구(國舅)가 되어 문벌의 경사(慶事)가 더욱 컸지만 마음 갖기를 더욱 겸손하게 하였으니 公의 높은 복덕(福德)으로 보아 마땅히 그 영화(榮華)를 누릴 터이요, 장수(長壽) 도 할 터인데 갑자기 이지경에 이르니 천도(天道)가 어찌하여 이렇게 박(薄)하였을까? 아, 애통하도다. 公의 病이 위독할 때에 유명(遺命)하기를 모든 상제(喪祭)를 일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하라고 했다 하니 여기에서 더욱 公의 平日의 수양(修養)한 바를 알 수 있도다. 甲午年 7月 己卯日 손시(巽時)로 금릉현=김포군(金陵縣=金浦郡)의 남쪽, 지금의 음단리(音段里)에 예장(禮葬)하였다. 夫人은 서하부 부인 임씨(西河府 夫人 任氏)니 公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 고양군(高陽郡)에 장사(葬事)하였다가 이제 옮겨서 公墓에 부장(부葬)하였다.
 夫人은 바로 감찰(監察) 휘 유(諱 柔)의 따님이니 監察도 王大妃 때문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을 증(贈)하였다. 夫人은 얌전하고 아름다워 현행(賢行)이 있어서 능히 덕문(德門)의 배필(配匹)이 될만하여 王大妃를 出生했으니 딸의 순차(順次)로 長女 인것이다. 男의 長은 환(歡)이니 통정 돈영부도정(通政 敦寧府都正)이요, 次는 열 항 순(悅 恒 恂)이요. 女는 종실 귀성군 준(宗室 龜城君 浚)에게 갔고 次는 돈영부직장 남효원(敦寧府直長 南孝元)에게 갔고 次는 문소전참봉 원재(文昭殿參奉 元재)에게 갔고 次는 어리다. 王大妃의 아들 현(현)이 제안대군(齊安大君)이요, 女의 長은 貞淑公主요, 次는惠順公主이니 먼저 卒했다. 直長이 一男을 生하니 걸(傑)이다.
 葬禮를 모신지 3個月만에 도정(都正)이 그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請하므로 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서(序)하고 銘해주노니
 德도 주었거니와 福도 주었는데
 그 壽에 대하여는 어찌 인색하였는고
 울창한 저 뫼뿌리여 차가운 저 강물
 여기서 公의 유당(幽堂)임을 銘하여 영원히 傳하노라.
 첨지중추부사 김 유(僉知中樞府事 金紐)가 짓다.
 
 추기(追記)
 아!우리 선조 청천부원군 양혜공(先祖 淸川府院君 襄惠公)의 墓에 옛 碑가 있었으니 첨지중추 김공(僉知中樞 金公)의 대필(大筆)이었다. 글은 비록 간략하지만 公의 벼슬한 이력(履歷)과 사행(事行)의 훌륭함과 문벌(門閥)의 혁혁함을 모조리 진술했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碑의 체제(體制)가 격(格)에 틀릴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니 風雨에 닳고 일그러져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21代孫 承基(-名 在鎔)가 이를 개탄하고“우리 祖考같이 벼슬도 높고 업적(業績)도 偉大한 분의 墓域이 이렇게 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하고 스스로 큰 돈을 내어 좋은 돌을 깎아 위의(衛儀 : 石物)를 고치고 따로 신도비(神道碑) 를 세워 그 글을 옮겨 각(刻)하기를 右와 같이 하였다.
 다만 이 글이 公이 작고한 數月 뒤에 나왔지만 그 生年 당호(堂號)며 부조(不조)를 命한일 또는 次男의 관직 여서(官職 女壻)가 모두 빠지고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左와 같이 추록(追錄)하여 참고에 자(資)한다.
 公은 世宗 丁未(西紀 1427)年에 出生했고 號는 의암(毅菴)이요, 成宗朝에 부조(不조 : 廟에 神主를 永遠히 奉安하고 祭祀지냄)를 命하였고 2男의 官은 府使요, 3男은 郡守 요, 四男은 諡號가 襄平이요, 5女는 判書 신수영(愼守英)에게 갔다.
 檀君紀元 4314년 辛西 春 2月 하순에
   18代孫 賢燮 삼가 기록하고
   21代孫 敬南 삼가 쓰다.
 
청천부원군 양혜 한공 휘 백륜 묘지(淸川府院君 襄惠 韓公 諱 伯倫 墓地)
 조선국(朝鮮國)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영경연사(議政右議政領經筵事) 청천부원군 양혜 한공의 묘지.
 (이 묘지는 신유년인 1981년 봄 비석을 다시 세우는 행사때 무덤 남쪽의 상석을 들어내다가 그 밑에서 발견한 것이다.)
 
 공의 휘는 백륜이요 자는 자후(子厚)요 성은 한씨이다.
 먼 조상인 휘(諱) 란(蘭)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고, 그의 9세 후손인 휘 악(渥)은 후덕중망(厚德重望)하여 벼슬이 삼한삼중대광도첨의 좌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 左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까지 이르렀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사숙공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대순(大淳)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事)요 공의(公義)가 있었으며, 중례(仲禮)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고, 각성(覺醒)은 출가하여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방신(方信)은 막내로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장군의 기량이 있어 신축년(1361) 홍건적의 난 때 서울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일등 공훈으로 수충병의 협찬공신(輸忠秉義協贊功臣)이 되었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정당문학(政堂文學)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중대광(重大匡) 서원군(西原君) 벼슬을 하였다.
 서원군이 낳은 아들 휘 휴(休)는 봉선대부(奉善大夫) 감문위호군(監門衛護軍)으로 양혜공에게는 증조부가 되는데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판서가 낳은 휘 계복(季復)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로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이 낳은 휘 창(昌)은 통정대부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지내면서 능력을 안팎에 날렸는데 그 재능이 칭송되어 순성적덕보조공신(純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정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 청천군(淸川君)에 추증되었다. 청천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판나주목(判羅州牧) 전의(全義) 이 욱(李 욱)의 딸을 아내로 맞아 선덕(宣德) 정미년(1427) 가을 7월 경인일에 양혜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남달리 크고 경술(經術)에 뛰어났다.
 병인년(1446) 겨울 음서(蔭敍)로 사온직장동정(仕온直長同正)이 되고 임신년(1452) 겨울에는 장사랑(將仕郞) 소격전직장(昭格殿直長) 벼슬을 받았다.
 한 늙은 관리는 공을 보고 기특해 하며, 공은 귀가 참으로 크니 뒤에 분명 귀현(貴顯)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윽고 경북궁사연(景福宮司涓) 직으로 옮겨 가면서 차차 공을 세웠다. 천순(天順) 임오년(1462) 왕대비가 간택되어 동궁에 들었다. 성화(成化) 병술년(1466) 의흥위부사과(義興衛副司果)를 제수(除授)받고 다시 봉훈랑(奉訓郞),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가 되었으며 무자년(1468)에는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가을 9월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보국승록대부(輔國崇祿大夫) 벼슬을 받고 청천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봉해졌으며, 역적 무리의 음모를 발각하고 척결하는 공을 세워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翼戴功臣) 철권(鐵券)을 내려 받았다.
 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덕을 칭찬하고 공을 포상함은 곧 고금을 통한 도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 집안을 맡아 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긍긍하다 뜻하지 않게 오랫동안 병을 앓던 차에 강순(康純),남이(南怡) 등이 모반을 꾀하여 그 재앙의 기운이 급박하게 들이닥쳤으나 천지조상의 묵묵한 보살핌을 입어 나쁜 음모가 저절로 드러났다. 경은 이러한 때에 총관금병(摠管禁兵)을 관할하고 있던 중 변란의 소식을 듣자마자 일어나서 달려와 온 힘을 다해 악당의 두목을 쳐서 없애었다. 아, 경에 대한 나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고 나에 대한 경의 보위는 더욱 신중해졌도다. 진실로 위급한 때가 닥치자 충정(忠貞)의 절개를 다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의 몸과 법도를 지켜내었다. 경의 노고를 생각하고 경의 공을 밝게 기리는 지금의 포상의 은전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내 감히 헤아려 책(策)을 내리노라. 경을 익대삼등공신(翼戴三等功臣)으로 하고, 각(閣)을 세워 초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리며, 그 부모와 처, 적장(嫡長)에게는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세습하여 그 복록을 잃지 않게 하고 비록 죄를 범하여도 평생동안 용서해주며, 또 반당(伴당) 6명, 노비 8명, 구사(丘史) 3명, 토지 80결(結), 은 25냥, 것ㆍ속 옷감 1단과 내구마(內廐馬) 1필을 내려 사용케 하노라. 아, 팔 다리와 같이 보좌하는 신하가 일찍이 나와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하였으니 산하대려(山河帶礪)의 맹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기축년(1469) 대광보국숭록대부로 품계가 올라가고 겨울에는 현 임금이 즉위하여 은수(恩數)가 더욱 커졌다. 다음 해인 경인년(1470) 여름에는 의정부우의정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청천부원군 벼슬을 받았다.
  공은 일찍이 정승이 되었음에도 더욱 신중하게 자신을 절제하여 사람들이 그 도량에 감복하였다. 공은 외척이 조정에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물러갈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신묘년(1471)에는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의 칭호가 내려졌다.
 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고로운 일에 힘쓰고 바른 도를 드러내어 일찍이 널리 구제하려는 공이 있다. 이에 덕을 숭상하고 공을 갚는 것을 크게 들어 보여주는 이 은전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사사로운 인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은 풍채가 남달리 크고, 도량이 넓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덕을 중히 여겼다. 선대의 조정에서 흉악한 무리가 난을 일으켰을 때 경은 존엄한 국구(國舅)의 몸을로 함께 일을 도모하여 (이들을) 제거한 공을 세워 사직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내 돌아보건대 저 아득한 끝에서 대통(대통)을 이어받았으나 연못에서 얇은 얼음을 밟은 채 건널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근신(近臣)들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경 임을 믿었고, 조정의 중망(重望)은 모두 태보(台輔)의 지위에 있는 경에게 두어졌다. 경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보좌의 임무를 극진히 하여 나 한 사람이  오늘날 하늘의 아름다운 법도를 맞을 수 있게 하였다. 내 이에 그 공을 가상히 생각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 공을 두터이 잊지 않고 책을 내리노라. 경을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으로 하고, 각(閣)을 세워 초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리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는 작위를 내리고 특히 적장에게는 두 단계 놓은 작위를 내리어 대대로 세습하여 그 복록을 잃지 않게 하고, 비록 죄를 범하여도 평생 동안 용서해 주며, 또 반당 8명, 노비 4명, 구사 4명, 토지 30결, 것   속 옷감 1단과 내구마 1필을 내려 사용케 한다. 아, 맹세컨대 산과 강물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기약할 수 있듯이 앞으로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더욱 노력하길 바란다."
 이 해(1471) 겨울에는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올 갑오년(1474) 5월 정해일 공이 병으로 집에서 졸하니 향년 48세였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침착하고 과묵하였고 겸손하게 행동하였다.
재상일 정도로 고귀하고 국구일 정도로 존엄하였으나 자신과 남을 대하는 데 예전과 다름이 없었고 일찍이 교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사는 집도 아주 좁고 누추하였다.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하였다. "고귀함은 왕대비와 같으면서 가마도 못 다닐 정도로 이리 좁은가." 공은 웃으며 말하였다. "이 집은 선인(先人)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비바람만 가릴 수 있으면 족하네. 만일 왕가의 가마가 행차하면 따로 막을 치면 되네. 평생 동안 살아 온 것을 다시 헐고 고쳐서 지나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성품은 또 밖으로 온화하고 안으로 엄하여 아들 환(환)이 육부당상(六部堂上)이 되었음에도 별다른 언색(言色)을 보이지 않았다. 병이 깊어지자 아들 환에게 직접 글을 써서 남기어 "부인이 세상을 뜬 지 3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또 병이 들어 날로 악화되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우니 내가 죽으면 무릇 상례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라 치르거라"고 말하였다.
 또 환에게 "왕대비께선 존엄하신 지위에 계시어 집안의 경사가 이미 크고 내가 또 정승이 되고 여러 번 훈공의 열에 끼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극히 중하여 갚을 수가 없구나.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일러 말하였다. 공이 졸하자 임금은 이를 매우 슬퍼하며 조정과 시장 업무를 3일 동안 멈추게 하고 특별히 쌀과 콩 각 100섬과 무명천 100필을 부조하였으며 따라 관리를 보내어 문상하고 왕대비도 격식대로 상을 치르니 삶과 죽음의 영화가 가히 지극하다 할 수 있었다.
  6월 갑신일 손시 김포(金浦) 서촌(西村) 검단리(儉丹里) 병좌임향(丙坐壬向) 자리에 하관하였다.
 공은 증(贈)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행사헌감찰(行司憲監察) 서하(西瑕) 임유(任柔)공의 딸을 아내로 맞아 4남을 두었는데 환은 통정대부 공조찬의(工曹參議)이고 열(悅), 항(恒), 순(恂)은 모두 아직 어리다. 또 5녀를 두었는데 왕대비가 맏이고 그밑은 귀성군(龜城君) 준(浚)에게 시집갔으며, 그 밑은 돈녕 직장(敦寧 直長) 남효원(南孝元)에게 시집갔고, 그 밑은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 원치(元치)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하나)는 아직 어리다.
 왕대비는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현(현)으로 제안대군(薺安大君)에 봉해졌다. 정숙공주(貞淑公主)와 혜순공주(惠順公主)는 이미 죽었다.
 참의(환)는 통정대부 행무장현감(行茂長縣監) 주지산(趙智山)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준은 아직 자녀가 없다. 직장(남효원)은 걸(傑)이라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부인 임씨는 공보다 2년 먼저 졸하였는데 왕대비와의 연고로 서하부부인(西河府夫人)에 봉해졌다.
                                     
                                        성화 10년(1474) 갑오년 6월 일 기록.
                                                  1997년 4월 7일 한명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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