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의 生厓와 後朝鮮 建國
                   
( 기자의 생애와 후조선 건국에 얽힌 내력 )

太祖 文聖王 箕子(태조 문성왕 기자)의 姓(성)은 子氏요. 諱(휘)는 胥餘(서여) 이시니 殷(은)나라의 14世王 武乙(무을)의 次子(차자) 理의 아들로(제을: 중국은 16세 무을왕부터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므로 이름 앞에 帝자를 붙인다) 17년 丙戌年 庚子月 癸丑日 庚申時(병오년 경자월 계축일 경신시)에 탄생하시었다. 殷(은)나라 17世王 帝辛(紂)를 섬겨 太師(태사)가 되셨고 箕(기)땅에 食邑(식읍)을 封(봉)하여 箕子(기자)라 칭하였다. 紂(주)의 淫蕩(음탕)하고 暴惡(포악)함이 날로 심해지므로 箕子(기자)께서는 힘써 諫(간)하였으나 紂(주)가 듣지 않고 오히려 가두고 奴隸(노예)로 삼으려 하였다. 버리고 가라고 勸(권)하는 사람이 있으나 臣下(신하)된 道理(도리)에 君主(군주)의 橫暴(횡포)를 諫(간)하다가 듣지 않는다고 버리고 가는 것은 君主(군주)의 惡行(악행)을 暴露(폭로)하고 자기만 民衆(민중)의 好感(호감)을 얻으려는 것이니 그럴 수 없다며 머리를 풀어 散髮(산발)하고 거짓 狂人(광인)이 되어 갖은 侮辱(모욕)을 다 받으며 거문고와 노래로 悲哀(비애)를 自慰(자위)하고 계셨다.

箕子(기자)께서 54세 되시던 己卯年(기묘년)에 周(주)나라 武王(무왕)이 紂(주)를 討滅(토멸)하고 親(친)히 殷太師 箕子(은태사 기자) 앞에 나아가 天道(천도)를 물으니 大道(대도)가 장차 暗昏(암혼)할까 念慮(염려)하사 나는 義理上(의리상) 周(주)나라의 臣僕(신복)이 될 수 없다 하여 洪範九疇(홍범구주; 書經(서경)의 홍범에 있는 禹(우)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가지 원칙)를 武王(무왕)에게 傳授(전수)하고 東國 朝鮮(동국 조선)으로 망명하시니 朝鮮人士(조선인사)들이 箕子(기자)의 聖德(성덕)에 悅服(열복)하여 높이 받들고 王(왕)을 삼으니 都邑(도읍)을 平壤(평양)에 정하고 國號(국호)를 後朝鮮(후조선)이라 칭하였다.

國民(국민)에게 詩 書 禮 樂(시,서,예,악)을 교육하고 農事 養蠶 織造 工作(농사, 양잠, 직조, 공작)을 敎導(교도)하며 八條(팔조)의 敎法(교법)을 設定(설정)하니 온 국민이 太平歌(태평가)를 부르며 頌德(송덕)하였다.

在位(재위) 40年 壽93세로 薨(훙)하시니 陵(릉)은 平壤城北七星門(평양성 북칠성문) 外王荇山(외왕행산; 今兎山(금토산) 子坐(자좌)이고 宮殿遺址(궁정유지)는 正陽門(정양문) 내에 있고 遺蹟(유적)으로는 崇仁殿(숭인전), 仁賢書院(인현서원)과 箕子誌(기자지), 平壤誌(평양지), 韓國書史(한국서사), 三國史記(삼국사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影幀(영정)은 成川百靈山(성천 백령산)에 奉安(봉안)되어 있다가 현재 全北 鎭安(전북 진안)에 移安(이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