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족보(族譜)는 세계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系譜學)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 즉 오(吳:222~280)·동진(東晉:317~420)·유송(劉宋:420~479)·남제(南齊:479~502)·남량(南梁:502~557)·남진(南陳:557~589)시대에서 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고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서 고려 의종(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간행된 문화류씨영락보(文化柳氏永樂譜)인데 서문(序文)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1476년(성종 7년)에 발간된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라 할 수 있다.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인 성화(成化) 12년에 간행되었다 하여 성화보(成化譜)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족보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전해진다. 이후 1562년(명종 17년)에 문화류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勢族)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문화류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는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외손(外孫)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후 여러 문중(門中)의 족보를 만드는데 표본이 되었다.

일부 명문세족(勢族)만이 지녔던 족보가 조선 선조 임금을 고비로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신분제도가 붕괴된 것이 족보의 발달을 촉진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家門)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