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조부군의 태생지(始祖府君의 胎生地)

 


 난곡리 입구

우리 淸州 韓氏의 대동족보(大同族譜)가 조선조 광해 9년(朝鮮朝 光海 九年 : 단기 3950. 시기 1617)에 초간(初刊)된 이래 6회에 걸쳐 간행(刊行)되었고 선조(先祖)의 유사(遺事)에  유관(有關)한 기록(記錄)은 여러가지로 있으되 시조부군(始祖府君)께서 시거청주(始居淸州)라 하여 처음 청주(淸州 )에 복거(卜居: 살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하신 이후의 사적(事蹟: 사실의 자취)으로부터 기록(記錄)이 있을 뿐이고 그이전(以前)의 탄생(誕生)과 성장과정(成長過程)에 있어서의 기사(記事)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인(大人: 큰어른. 훌륭한 위인)의 행적(行跡 : 지난자취)은 일시적(一時的)인 회현(晦顯 : 세상에 알려집과 알려지지 않음)은 있을지언정 영원히 인몰(湮沒 :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림)되지 않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法則)인지라 부근(府君)의 태생지(胎生地 :태어난 곳)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라는 사실이 천년(千年)후인 지금에 이르러 국가기관에 비치(備置)된 공문서와 현지의 지명(地名)과의 관련과 동리(洞里)의 노인(老人)과 부녀(婦女)들 사이에 어제와 오늘일과 같이 구전(口傳)되는 사실이 생생하게 입증(立證)되므로 근래(近來)에 와서는 보첨(譜牒)에 올려서 우리로 하여금 현지(現地)에 살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동군지 초(永同郡誌 抄)

토란리(吐蘭里 : 지금의 난곡리 옛 이름)는 황간면(黃澗面)에 있고 고려 태위 한란 (高麗 太尉 韓 蘭)의 태지(胎地 : 태생지)이기에 이렇게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황간읍지 초(黃澗邑誌 抄)

 한태위 휘 란(韓太尉 諱 蘭)의 태생지(胎生地)가 본읍 동면 토란리(本邑 東面 吐蘭里)에 있으니 지금(至今)까지 그 집은 해읍(該邑)으로부터 매년 개초(每年 蓋草)를 하여 천추(千秋)에 전(傳)하도록 한다.

 황간읍(黃澗邑)의 연혁(沿革)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소라현(召羅懸)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때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懸)이 되었더니 고려 현종(高麗 懸宗)때 경산부(京山府)로 성주(星州)에 속(屬)하였고 조선조 태종(朝鮮朝 太宗)때 청산(靑山)과 병합(倂合)하여 황청현(黃靑懸)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번천하여 조선조말엽 고종(朝鮮朝末葉 高宗)때에 황간군(黃澗郡)으로 승격(昇格)되었더니 일정(日政)때에 영동군(永同郡)으로 병합(倂合)되어 황간면(黃澗面)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