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조유기 방정리 봉심전말(始祖遺基 方井里 奉審顚末)

方井里(方西洞)는 시조부군(始祖府君)이 길지(吉地)를 잡아 이곳에 정착(定着) 하사 권농(勸農 : 농사를 권장) 하며 훈학(訓學 : 글을 가르침) 하신 고지(故地 : 연고의 땅)이다. 그러나 시조 이후 대(代)를 이어 이곳에 살던 형편이 못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사이 주인을 잃고 풍상(風霜)속에 묻혔다가 실로 380년만에 확실하게 찾은 바 되니 그 앞뒤를 살펴보면 연대(年代)는 미상이나 문경공(文敬公 :  諱 脩수) 이 쓴 유항문집(柳巷文集)에 내집이 方井里에 있다는 구절(句節)이 있고 충성공(忠成 : 韓 明澮)이 고향(故鄕)을 그리는 뜻에서 方井里  찾아와서 세업(世業)을 이어 설단치제(設檀致祭)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있으며 그후 광해 10년(단기 3951.서기1681)에 이랑공 (吏曹正郞公) 후(后) 여명공(諱 震英)이 이판서(李判書 .李時發)의 전언(傳言)으로 方井里  찾아가서 옛 터를 다듬고 方井 (우물)을 개수(改修)하고 일가권속(一家眷屬)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으니 시조(始祖)의 천년구기 (千年舊基)를 찾은 것이다.

   ※ 여명공 진영(여溟公 震英)은 충간공 휘 .리 (忠簡公 諱 理)의 후예(後裔) 로서 전판서 이시발(前判書 李時發)의 질서(侄壻)가 된다.  光海 戊午 (檀紀 三九五一. 西紀 一六一八年)에 李判書가 장차 은퇴(隱退)할 택지(宅地)를 구하려고 청주 동남방지대(淸州 東南方地帶)를 순력(循歷)하다가 한 地点에 당도(當到)하여 주위(周圍)를 관망(觀望)하던 中 일페의한사(一페衣寒士)가 나타나서 이르되 여기는 한태위(韓太尉)의 유허 방정리(遺墟 方井里)인즉 韓氏가 아니면 점거(占居)할수 없다 하거늘 李判書이 事實을 질서(侄壻)인 여명공에게 傳하니 여명공은 이말을 듣고 吾韓門中 의 숙원(宿願)이 이제야 성취(成就)됨을 환희불금(歡喜不禁)하야  즉시(卽時)로 方井里에 찾아가서 황량(荒凉)한 옛터를 다듬어서家屋을 세우고  方井을 준설(浚渫)하여 솔권반이(率眷搬移)하니 이것이 흥폐(興廢)가 무상(無常)한 속에 천년구기(千年舊基) 방정리(方井里) 다시 옛 主人을 찾은 전말(顚末)이다

 청주읍지 초(淸州邑誌 抄)

 방정리(方井里)는 청주읍 남방 육리(淸州邑 南方 六里) 쯤 무농평(務農坪)동쪽에 있으니 한태위(韓太尉  시조부군)가 살던 곳이다.  太尉가 아직 出世할 기회(機會)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田園)에 은거(隱居) 하면서 몸소 농사(農事)에 힘써 누만석 거부(累萬石 巨富)가 되었더니 여 태조(麗 太祖)가 견 훤(甄 萱)을 정벌(征伐)하러 갈 때 그 行軍이 門前에 이르거늘 太尉公이 장검 영점(仗劍 迎接)하여 十萬大兵을 배불리 먹이고 드디어 종군(從軍)하여 용력(勇力)을 떨치며 지모(智謀)를 짜서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고 신라(新羅)를 강복(降伏)받아 통합(統合)하는 훈업(勳業)을 성취(成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