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조부군의 무농정(始祖府君의 務農亭)

 

         (忠北記念物 第85號, 1990. 12. 14 指定) 

무농정

務農亭은 東北方에 웅장한 상당산(上黨山)을 등에 지고 南西편으로 展開한  三十里 大野 務農坪을 향하여 금반옥안형(金盤玉案形)으로 유명한 승지 방정리 후록(勝地 方正里 後麓)에 자리잡고 있다.  太尉府君께서 이 정자(亭子)를 창건(創建)하시고 여기서 기거(起居)하시면서 농업(農業)을 권장(勸奬)하시고 제세경륜(濟世經綸)을 연마(鍊磨)하시던  도장(道場)이요  方正과 아울러 公의 여향(餘香)이 연면히 흐르고 있는 유적(遺蹟)인 것이다. 이후 천여년(爾後 千餘年)에 사물(事物)의 소장성쇄(消長盛쇄)가 무상(無常)한지라 方正里가 일시폐허(一時廢墟)로 황량(荒凉)한 처지(處地)에 있게되니  務農亭의 소재를 더구나 알길이 없게 되었다. 이조 숙종년간(李朝 肅宗年間(1688)에 後孫 근(根)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本州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자 우선 방정리에 찾아와서 무농정 구지(務農亭 舊地)을 찾아 비석(碑石)을 세워 표증(表徵)을 하여 두었고 光復後 己丑年(1949)에 方正里 宗中의 발기(發起) 全國 宗門이 성의(誠意)를 모아 亭子를 重建하였다. 그러나 6.25動亂으로 인한 관리 소홀로 원형보전(原形保全)이 어렵게 되어 지난 戊辰(1988)年에 中央宗親會가 主管하고 淸州市가 고려건축양식(高麗建築樣式)에 따라 원형(原型)대로 설계(設計)하여 정부보조금(政府補助金)과 後孫들의 성금(誠金)으로 재중건(再重建)하였다.

 

※무농정(務農亭)이 원위치(原位置)에 보전(保全)된 경위 

 

무농정 전경

현재의 무농정(務農亭)은 시조부군(始祖府君)이 창건(創建)할 때의 원위치(元位置)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사이 혹은 허물어지고 또 다시 세우고 고치기를 몇번이나 거듭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1992년 청주시 도시개발확장에 따라 토지개발공사가 주관한 택지 조성에 일괄 포함되었을 때 강력한 유보운동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보전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는 후손으로서 각별히 노력한 봉석(鳳錫) 종인宗人 이 있음을 첨기하여 둔다.  이碑石은 조선 숙종 14년(단기 4021 . 서기 1688)이름만 전해오는 무농정 옛터에 후일의 고증(考徵)할 신표(信標)로 삼고자 세워 진 것이다.  시조부군(始祖府君)의 묘소(墓所)를 실호(失護)한지 오래되어 봉심(奉審 보살핌)할 길이 없던 때에 구암공(久菴公: 諱 百謙(백겸)이 선조 38년 (단기 3938. 서기 1605)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시조유기(始祖遺基)를 성의를 다해 찾아 단을 쌓고 비(碑)를 세우고 제전(祭田)을 사들여 매년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할 기틀을 마련하였고 석탄공이 광해 9년(단기 3950. 서기 1617)에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부임하여 단을 수축(修築)하고 상구(床具:제사기구)를 마련하여 세사(歲祀) 봉행(奉行)에 만전을 기했다.

※ 그러나 이곳은 방정리의 이웃 동네인 월오동으로 단은 훼실되고 비석만 뒷산 아래 밭가운데 서 있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1990.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