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靑北道 記念物 弟 72호 (1987. 3. 31指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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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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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세향일: 음 10월 1일)
시조부군 휘 란(諱. 蘭)의 묘(墓)는 배위(配位) 송씨(宋氏)와 합조(合兆) 이다.
가산(駕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이며 속리산(俗離山)이 갑방(甲方 : 正東에서
北으로 15도의 方位를 中心으로 한 15도안의 方向)인고로 이르기를 회룡고조(回龍顧祖
: 山의 地脈이 뺑돌아서 本山과 맞섬)라 하여 길지(吉地)라 한다. 중간에 실호(失護)되어
추모(追慕)하는 후손들이 단(壇)을 쌓고 비를 세워 세일제(歲一祭)를 받들기도 하였다.
잘못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고 자손이 있으면 반드시 조상을 찾게 마련이다.
숙종 14년(1688) 묘하(墓下)에 고용되던 한모(韓某)가 탐문한 바 그동네에 사는 모인(某人)이
공의 산소를 파헤치고 묘갈을 동강내어 우물 바닥에 묻고 산소 전후면에 투장(偸葬)하였다는
정보(情報)를 후손 성헌(聖憲)에게 告하니 다시 청주병사 근(淸州兵事 根)에게 제보하여
조사한 바 중절(中絶)된 비(碑)의 자획(字劃)이 완연함에 곰 묘임을 확인하고 이듬해
후손 성우(聖佑), 형(형), 숙(塾)등이 제소하여 확인을 얻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다시 묻고 개봉축(改封築)하여 표석(表石)도 세웠다. 묘비는
숙종 30년(1704)에 개수(改竪)하고 신도비(神道碑)는 영조 (英祖)44년(1768)에 세웠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룰 제72호이다. 비문(碑文)은 후손 좌의정 익모(左議政 瀷모)가
짓고 형조판서(刑曹判書) 광회(光會)가 썼으며 한성좌운 덕필(漢城左尹 德弼)이 전(篆)했다.
※ 재실 [齋室]
재실(齋室)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14년(단기4021.서기 1688)에 실호(失護)했던 시조묘소를 다시 찾아 모시고
재사(齋舍)를 건축하며 묘하에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세향일(歲享日)을 음 10월 초정일(初丁日)로 정할때의 일이고
그후 단기 4121. 서기1788년에 중건하여 비로소 세일재(歲一齋)라고 현판(懸板)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重修) 중건(重建)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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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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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재
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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