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지墓誌 [역문]
태위공의 휘(이름)는 란(蘭)이요 성은 한씨(韓氏)이니 본관(本貫)은 상당(上黨
:淸州 古號)이다 상당 한씨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한 바 기자의 세대가 쇠퇴하여
마한(馬韓)이 되었고 그 자손이 상당현에 살면서 한씨라고 칭하였으니 그사실이 위지(魏誌)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다. 태위공께서 고려조(高麗朝)를 보우하여 삼한을 통합하시니 그
훈명 높은 사적이 사서(史書)에
찬란하게 조영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갑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상당은 청주의 구호(舊號)이며
청주읍에서 동남으로 무농정이 있는 방정리는 즉 태위공의 유허이고 또 거기서 남쪽으로
7.8리쯤에 가산(駕山)이 있으니 이곳이 태위공 묘소가 계신 곳이다. 옛날에 삼중대광 태위 한이라는 일곱 자가 각자로 된 표석이 있는
것을 읍내에 사는 노인이나 사대부들이 목견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자손으로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 마침 군민 중 노 봉(蘆 峰)이란 자가 있어 효종 10년(1659)에 제 아비를
태위공 묘소 후측에 투장하고 노 봉이 사망하니 또 태위공묘 전면에다 도장(盜葬)
하였다. 숙종 14년(1688)에 후손 장령 형과 지평 성우(聖佑)가 처음으로
이사실을 듣고 알게되어 제종들과 더불어 회덕현감에게 제소하였더니 노 봉의 족속들이
감히 은피하지 못하고 고노(古老)들의 전설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노 봉의 자식은
그 부조 양대의 무덤을 발굴하여 갔다. 동년 10월에 절도사 근(根)등이 태위공 묘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옛 봉분을 헐고 개봉축하였는데 광중(壙中)에 삼층 석축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니 고려시대의 석장제도(石葬制度)였던 것이다. 마침내 구제대로 봉축하니 주위가 32척이요 높이가 9척이었다. 그
다음 해 가을에 간악한 천민 재관(再寬)이가 법관을 선동해서 임금의 총문을 속이여
광중을 파보니 거기서 삼연석(三鍊石)과 사철정(四鐵釘)을 보게 되었다. 재관이는
임금 속인 죄로 벌을 받고 경조랑(京兆郞)은 범광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왕이 군수에게 명하여 분묘를 개봉축하게 하였다. 아- 원통함이다. 태위공의 지하에까지
미치는 화변은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개광(開壙)할 것을 요청한 자는 경조윤 이자정(京兆尹 李字鼎)이요
일을 맡아본 자는 참군 민광로(閔光魯)였다. 태위공의 내외 자손들이 그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산소를 실전(失傳) 하였다가 다시 심득(尋得)한 사유를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고 지석(誌石)을 배장하여 후인들의 고증(考徵)이 되도록 하련다.
황명숭정경오(1690)
8월 일 후손
생원 숙(塾) 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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