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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젊은별
ㆍ작성일 2010-07-28 (수) 16:12
ㆍ추천: 0  ㆍ조회: 1044       
ㆍIP: 210.xxx.202
襄節公의 子孫들
襄節公의 子孫들
[한확 韓確] 1403(태종 3년)~1456(세조2년)
조선의 문신. 시호는 양절(襄節),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군사(軍事)영정(永矴)의 아들로 누이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비로 뽑혀 여비(麗妃)가 되자 1417년(태종 17년) 진헌부사(進獻副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광록시소경(光錄侍少卿)이 되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靑諡承襲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38년 (세종 20년) 중추원사(中樞院使),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 도관찰사를 역힘했다.
 1443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1445년 지중추원사(知中樞原事)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이조판서를 지낸뒤 1451년(문종 1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 왔다.
 1453년(단종 1년) 좌찬성(左贊成)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에게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올랐다.
 1455년(세조 1년) 좌의정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이 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改封)된 후 사은사로 명날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양위(讓位)로 명분을 세워 명나라를 설득시겼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객사(客死)했다. 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한치인 韓致仁] 1421(세종3년)~1477(성종8년)
조선의 문신. 시호는 공안(恭安), 좌의정 확의 장남,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오빠, 1444년(세종 26년) 음보(蔭補)로 세자(世子)시강원(侍講院) 우세마(右洗馬)가 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월성군(月星君)에 봉해지고 앞서 세조때에 고모(姑母)가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後宮)이 된 인연으로 1471년에 정조사(正朝使), 1474년 성절사(聖節使)로 두차례 명나라에 다녀 왔다.

[한치의 韓致義] 1440(세종22년)~1473(성종4년)
조선의 문신. 자는 의지(誼之), 시호는 장도(章悼) , 좌의정 확(確)의 2남, 덕종비 소혜왕후의 오빠, 1455년(세조1년) 16세때 음보(蔭補)로 사정(司正) 겸 상서사녹사(尙瑞司綠事)가 되고, 이듬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59년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을 거쳐 군기시부정(軍器侍副正) 안동부사(安東府使) 상호군(上護軍)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이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471년(성종 2년) 호조(戶曹)참판(參判)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 청양군(淸陽君)에 개봉(改封)되고 공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한치례 韓致禮] ? ~ 1499(연산군 5년)
조선의 무신. 자는 자절(子節), 시호는 장간(莊簡), 좌의정 확의 3남, 소혜왕후의 오빠, 무과(武科)에 급제, 1466년(세조 12년)에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을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서릉군(西陵君)에 봉해지고, 1473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1477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47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그후 이조․호조․공조․병조의 판서에 이어 좌참찬(左參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도총관(都摠管)등을 지냈고, 후에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470년부터 내섬시(內贍侍提調)를 23년간 지냈다.

[한응인 韓應寅] 1554(명종 9년) ~ 1614(광해군 6년)
조선의 문신.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시호는 충정(忠靖), 부사직(副司直) 경남(敬男)의 아들로 양절공의 6대손이다. 1576년(선조 9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지평(持平)을 지내고,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8년 신천(信川)군수(郡守)로 부임하여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실을 적발하여 고변(告變), 그공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르고 승지(承旨)를 지냈다.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정여립 모반을 고변한 공을 평(平)난(難)공신(功臣) 1등에 각각 책록되었으며, 1591년 예조판서가 되어 진주(陳奏)사(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八道) 도(都)순찰사(巡察使)로 왜군 격퇴에 힘쓰다가 요동(遼東)에 건너가 원군(援軍)의 급속한 출병을 청원, 이러 지원하러 나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접반관(接伴官)으로 맞았다.
 이듬해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지고 서울이 수복되자 질서 회복에 힘썼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군량 보급을 원활히 했다.
 1595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8년 우찬성(右贊成)에 승진,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1605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1607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608년 병이 위독해진 선조에 의해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호를 부탁 받았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放歸)되어 광주(廣州)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후에 신원(伸寃) 되었다.

[한인급 韓仁及] 1583(선조 16년) ~ 1644(인조 22년)
조선의 문신. 자는 원지(元之), 호는 현석(玄石)․서석(瑞石), 우의정 응인(應仁)의 아들로 1601년(선조 34년) 진사(進士)가 되고, 1609년(광해군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으로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수찬(修撰)․정언(正言)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 5년) 아버지가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사직,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병조(兵曹)좌랑(佐郞)이 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때 삼도독향어사(三道督餉御使)로 군량을 조달했다.
 1636년(인조 11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형조판서(刑曹判書)에서 개성부(開城府) 유(留)수(守)가 되어 강화(江華)에 피난했다.
 이듬해 환도했으나 병으로 개성에 부임하지 못하여 면직되었다.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형조판서(刑曹判書)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 1634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어 진향부사(進香副使)로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서예(書藝)에 뛰어나 팔법(八法)에  능했다.

[한익모 韓翼謨] 1703(숙종29년) ~  ?
조선의 문신.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 시호는 문숙(文肅), 진사(進士) 사범(士范)의 아들로 응인의 6대손이다. 1733년(영조 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이조정랑(吏曹正郞)․승지(承旨)를지내고, 1744년(영조 20년) 광주(廣州) 부윤(府尹)이 되었다.
 그 후 대사간․예조판서를 역임, 1762년(영조 38년) 판의금부사(判義琴府使)로서 나경언(羅景彦)의 고변(告變)사건(事件)이 일어나자 이를 사주한 배후를 규명하라고 주장하고 , 이어 대제학으로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은 경위를 밝히는 교서의 작성지시를 거절했다가 한때 삭직(削職)되었다.
 1766년 좌의정, 1772년 영의정에 올랐다. 1776년(정조 즉위)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을 국문(鞠問)할 때 불참(不參)했다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 당하고 문외(門外) 출송(黜送)되었다.
 이어 풍천(豊川)에 유배, 연안(延安)에 이배(移配) 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왔다.

[한용구 韓用龜] 1747(영조 23년) ~ 1828(순조 28년)
조선의 문신. 초명은 용구(用九),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시호는 익정(翼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후유(後裕)의 아들로 현모(익모의 형)의 손자. 1773년(영조 4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76년  주서(注書)가 되고, 예조좌랑․응교(應敎)를 역임, 1796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있다가 임금을 모독했다는 죄로 삭주(朔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그후 대사간․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1799년 진하(進賀) 겸(兼) 사은(謝恩)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800년(순조 즉위)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802년 전라도 관찰사, 1805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1806년에 죄인 김달순(金達淳)을 탄핵하는 대신(臺臣)이 용어 속에 그와 영의정 서매수(徐邁修)를 공박하는 귀절이 있어 사직하고 낙향했다.
 1809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진하(進賀) 겸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1811년 약원(藥院) 도(都)제조(提調)를 겸했으며, 1812년 왕세자가 책립(冊立)되자 좌의정 겸 세자(世子)부가 되었다.
 181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1821년 영의정에 승진하여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장례를 마친뒤 사직, 영증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름아이콘 젊은별
2010-07-28 16:29
13세 양절공의 후손은 14세 공안공(치인-장남), 장도공(치의-차남), 장간공(치례-3남)으로 구분하여 검색하여야 하고, 족보에 등재된 이름으로 검색하여야 검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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