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壯公 韓百祿(1555-1592)은 字는 수지(綏之), 본관은 청주이며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서 태어나
선조(宣祖)13년(1580)에 25세로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하여 바로 진잠감(鎭岑監)에 배령(拜
命)을 받고 農業 蠶業을 권장하며 병기(兵器)를 수리보완하여 사졸훈련에 힘쓰던 중 지세포(知世
浦) 만호(萬戶)로 부임하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
信)장군 등과 釜山 玉浦 唐浦 등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한 정발(鄭撥)장군의 후
임으로 公을 부산첨사(釜山僉使)에 임명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7월17일 남해 미조항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38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신이다.
公에게 영조 28년(1752)에 忠壯으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순조8년(1808)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작(贈爵)되고, 配位 成氏에게는 貞夫人으로 가자(加資)가 내려졌다.
◁ 답사후기 ▷
조선의 왕이 내린 忠壯公이란 이름과, 나라에 몸바친 충신의 묘역답지 않게너무 초라해서
나라와 후손들이 없는 묘역 같았다. 그래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1호」의 묘역인데,
나라를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을 이토록 홀대하는 강원도 도민인가 싶었다. 역대 대통
령들의 호화스런 생가 전시관 동상들을 비교해 보면 그렇다. 기백만원이면 둘레석을 치고
예쁘장하게 분묘도높일 수 있을 텐데, 강원도 岩下老佛의 心性은 다 어디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