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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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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P: 123.xxx.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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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성 명】 한확(韓確)
【생몰년】 1403(태종 3)∼1456(세조 2)
【본 관】 청주(淸州) 한(韓)
【자·호】 자유(子柔), 간이재(簡易齋)
【시 대】 조선 전기
【성 격】 문신
1403(태종 3)∼1456(세조 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이다. 군수를 지낸 한영정의 아들로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그의 누이가 명나라 태종의 후궁이 되어 후에 여비(麗妃)로 봉해지자 그 역시 19세 때 명나라에 불려가 그곳에서 벼슬하여 광록 소경(光祿少卿)에 이르렀고, 돌아와서는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이 되었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의 작호를 받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하고 나서 명의 허락을 요청하자 명의 문황제(文皇帝)는 그를 책봉 정사로 삼아 조선에 보내 이를 승인하였다. 그의 누이가 중국의 왕비인데다가 그 역시 외교적 처신이 뛰어났기 때문에 조선초(朝鮮初)의 양국 사이의 외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매우 컸다. 세종은 그가 대임을 맡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세종 17년(1435)에 자헌 중추원 부사(資憲中樞院府事)에 임명하였다. 1439년에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으며 곧 이어 경기도 관찰사 · 병조 판서 · 함길도 순찰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어 서울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1445년에는 이조 판서가 되어 오랫동안 문무지선(文武之選)과 인물들의 장부(臧否)를 장악하였다. 곧 이어 서북지방의 사정이 피폐하다는 논의가 있자 특별히 평양 부윤(平壤府尹) 겸(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제수되었다. 서북지역에 내려가 어지러운 지방행정을 개혁하고 그 지역 사람들의 병고(病苦)를 덜어 주기에 힘써서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칭송이 높았다.
문종대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던 그는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등공신이 되고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이러한 공으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정정(政情)이 불안하였던 세조 초반의 내외의 대소 사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중국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즉위하게 된 전말을 중국측에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456년 명에서 관복(冠服)을 보낸 것에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 오다가 단천(端川) 역관(驛館)에서 죽었다. 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간 정무를 쉬게 하고 한명회(韓明澮)를 보내어 그의 장례를 살피게 했다.
그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훈구대신으로서 뚜렷하게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원만한 성품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왕조 초기의 기반 확립에 적지않게 이바지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관련항목】 한치의(韓致義) 한치인(韓致仁) 성종(成宗) 소혜왕후(昭惠王后) 계양군(桂陽君)
계유정난이 뭐 대수입니까? 을사오적만 아니면 됐죠ㅎ(농담)
인터넷에서 퍼온 글인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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