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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한동신
ㆍ작성일 2011-12-19 (월) 11:51
ㆍ추천: 0  ㆍ조회: 1056       
ㆍIP: 221.xxx.208
청주한씨
청주 한씨(淸州韓氏)
  시 조 휘(諱): 한 난(韓 蘭), 태위(太尉)
  시 호(諡號): 위양(威襄)
  묘소‥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산리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百濟)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청주(淸州)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버바에 따라 시(市)가 되었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는 한 난(韓 蘭)인데, 기자(箕子)의 후예로 상당(上黨) 한씨(韓氏)를 습성(襲姓)하였다는 우량(友諒)의 32세손으로 전한다.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에 의하면 난(蘭)은 서기 928년(태조11)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할 때 장검(長劍)을 들고 함께 출정하여 삼한(三韓) 통합(統合)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으며, 청주 방정리(淸州方井里)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청주(淸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특히 고려와 조선 전반기에 크게 세력(勢力)을 떨쳤으며, 왕실(王室)을 배경으로 한 권력(權力)의 중축(中軸)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政治的) 사건(事件)에 한씨(韓氏)의 입김이 닿지 않는 예가 드물 정도였다. 이러한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난(蘭)의 7세손 강(康)이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충렬왕(忠烈王)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와 「고금록(古今錄)」을 저술했으며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밀직사(密直使) 영(英)의 아들 종유(宗愈)는 충혜왕(忠惠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졌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이어 1349년(충정왕1)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치사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왕의 지극한 대우를 받았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명사(名士)들과 함께 술에 취하면 「양화사(楊花辭)」를 읊었으므로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웠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右政丞)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져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대순(大淳), 정당문학(政堂文學) 중례(仲禮), 첨의평리(僉議評理) 방신(方信) 등 일곱 아들과 함께 당대에 뛰어났다. 한편 충목왕(忠穆王) 때 15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修)는 밀직부사(密直副使) 공의(公義)의 아들로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동지밀직(同知密直)을 거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글씨에 뛰어났고 깊은 학식과 행의(行誼)로 유명했다. 이러한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난(蘭)의 7세손 강(康)이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충렬왕(忠烈王)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와 「고금록(古今錄)」을 저술했으며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밀직사(密直使) 영(英)의 아들 종유(宗愈)는 충혜왕(忠惠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졌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이어 1349년(충정왕1)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치사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 서연관(書筵官)이 되어 왕의 지극한 대우를 받았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명사(名士)들과 함께 술에 취하면 「양화사(楊花辭)」를 읊었으므로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웠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右政丞)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져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대순(大淳), 정당문학(政堂文學) 중례(仲禮), 첨의평리(僉議評理) 방신(方信) 등 일곱 아들과 함께 당대에 뛰어났다. 한편 충목왕(忠穆王) 때 15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수(修)는 밀직부사(密直副使) 공의(公義)의 아들로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동지밀직(同知密直)을 거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청성군(淸城君)에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수(修)의 아들 상환(尙桓)·상질(尙質)·상경(尙敬)·상덕(尙德) 4형제가 모두 뛰어나 명문의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더욱 빛냈다. 그 중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를 지낸 차남 상질(尙質)은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주문사(奏聞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결정받고 돌아온 인물(人物)이다. 그리고 셋째 상경(尙敬)은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이성계(李成桂)의 개국(開國)을 도와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고, 정종(定宗) 때는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태종(太宗) 때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져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명문세족(名門勢族)의 반석(盤石)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忠成公)명회(明澮)는 영의정(領議政) 상질(尙質)의 손자(孫子)이자 감찰(監察) 기(起)의 아들이다. 그는 말직인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심복(心復)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에 올랐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승진, 이 해 가을 좌익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2년 뒤인 1457년(세조3)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신제대전(新制大典)」의 초안을 완성했다. 그의 슬하에는 성종(成宗)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된 아들 보(堡)와 딸 넷이 있었다. 맏딸은 세종(世宗)의 부마(駙馬)인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의 맏아들에게 출가했으며, 셋째 딸은 예종(睿宗)의 비(妃), 넷째 딸은 성종(成宗)의 비(妃)가 되었다. 한편 학문과 인품으로 세조(世祖)의 아낌을 받아 덕종(德宗)의 스승이 되었던 계희(繼禧)는 관찰사(觀察使) 혜(惠)의 아들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功)으로 익대삼등공신(翊戴三等功臣)으로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우 계순(繼純)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좌의정(左議政) 확(確)의 딸은 덕종(德宗)의 비(妃)가 되었으며, 아들 치인(致仁:판돈령부사에 오름)·치의(致義:병조판서를 지냄)·치례(致禮:좌참찬을 지내고 서원부원군에 진봉) 3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광해군(光海君) 때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효순(孝純)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여해(如海),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응인(應寅) 등은 가문을 한층 더 중흥시킨 인물들이다.특히 동방(東邦) 제일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진 호(濩)는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 교(橋)와 더불어 학명(學名)을 날렸다. 석봉(石峯) 호(濩)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중국(中國)의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류(石峯流)의 호쾌(豪快)·강건(剛健)한 서풍을 창시했으며,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조선(朝鮮) 서예계(書藝界)의 쌍벽을 이루어 동양의 명필(名筆)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효종(孝宗) 때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흥일(興一)과 숙종(肅
宗) 때 대사헌(大司憲) 세량(世良), 순조(純祖) 때 영의정(領議政) 용구(用龜), 고종(高宗) 때 우의정(右議政) 계원(啓源) 등이 명망높은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더욱 빛냈다.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봉수(鳳洙)와 상렬(相烈)은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대홍(大弘)· 상호(相浩)· 우종(禹宗)· 필호(弼昊)· 훈(焄)· 흥(興)·흥근(興根) 등과 함께 충렬(忠烈)로서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萬海) 용운(龍雲)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고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남한(南韓)에 총 142,894가구, 597,5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2011년 12월 6일 중앙박물관 도서실에서 ※ 始祖 韓 蘭 의 29세 忠成公 15세 孫 韓東信 발취
이름아이콘 한규순
2012-01-07 00:55
참으로 방대한 자료를 올리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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