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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참의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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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3-11-30 (토) 0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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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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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P: 14.xxx.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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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공파 훈령
15세 韓 訓(한훈)承旨公 세조5년(1459)~연산 5년(1499년) 1월24일(갑신) 공(公)의 휘(諱)는 훈(訓)이요, 자(字)는 사고(師古)이며, 태위한란(太尉韓蘭)의 십사대손(十四代孫)이시다. 증조부(曾祖父)의 휘(諱)는 영정(永矴)이시니, 증참의정행군수(曾叅議政行郡守)이시고, 조부(祖父)의 휘(諱)는 전(磌)이시니, 통정호조참의(通政戶曹叅議)이시고, 부(父)의 휘(諱)는 충인(忠仁)이시니, 가선절도사(嘉善節度使)이시고, 모(母)정부인안동김씨(貞夫人安東金氏)는 지돈령부사 김중엄(知敦寧府事 金仲淹)의 여(女)이시며, 평양부원군 조대임(平壤府院君 趙大臨)의 외손(外孫)이시다. 공(公)이 명 천순기묘(明 天順己卯)(1459년)에 생(生)하시니 재기(材器)가 일찍 이루어 지시고 학행(學行)이 모두 넉넉 하심으로 사류(士類)들이 흠모(欽慕)하였으며, 일시(一時)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종유(從遊:입에서입으로전해는말)하였다. 계모(繼母)이씨(李氏)가 성엄(性嚴:성품이 엄했다)하여, 모든 자녀(子女)들이 그 뜻을 맞추지 못하였으나, 공(公)이 홀로 능(能)히 그 기뻐하는 마음을 얻음으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공(公)의 나이 이십세(二十歲)가 넘어서 사마양과(司馬兩科)에 올랐으며, 또 성종말년(成宗末年)별시(別試)에 장원(壯元)하였으며, 연산(燕山)이 사위(嗣位:즉위)하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서 그 전복(顚覆)의처음, 처사의 잘못에 논핵(論劾)을 피치 않았으며, 소릉(昭陵:端宗母의墓)복위사(復位事)를 건의(建議)하여 숨김없이 직언(直言)하므로, 군사(羣邪)들이 측목(側目:눈을 딴곳을돌림) 하고 혼주(昏主:연산군)가 깊이 미워 하므로, 좌천(左遷)되어 황해도사(黃海道事)로 나갔다가, 돌아와 소격서령(昭格署令)에 제수(除授)되었다. 무오년(戊午年)(1498년) 리산(理山:함경남도 초산)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사환(賜還:죄를사하여 돌아옴)되어 집에서 졸(卒)하시니, 목희도에 계신 외조모묘(木希道外祖母墓:목희도.당인리부근)곁에 장례(葬禮) 모시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중전(重典:엄한죄)에 빠지었고 그때에 내산리(柰山里:경기도고양시덕양구내유동선영)로 이장(移葬)하였다. 부인광주정씨(夫人光州鄭氏)는 현풍(玄風:경상도현풍)에 편예(編隸:종 으로 편입)되고,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邊郡:가족이흩어짐)으로 이사하여 살았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에 이르러서, 승정원도승지(承政院度承旨)에 추증(追贈) 되었고, 또 조카 소위장군부군 휘 곤(昭威將軍府軍諱鯤)으로 기후(其後)하고, 드디어 자손록용(子孫錄用:대를이음)의 명(明)을 내리었다. 부군생시(府君生時)에 양모(養母:양자간어머니)의 묘(墓)를 영차(塋次:선영先塋)로 이부(移祔:옮김)하고자 하셨으나, 로원력약(路遠力弱:길이멀고 힘이약함)하므로 결행(決行)치 못하시고, 지금 그 묘(墓)는 현풍(玄風)에 계시다. 부인 광주정씨(夫人 光州鄭氏)는 통훈대부행청도군수 정찬우(通訓大夫行淸道郡守 鄭讚禹)의 여(女)이시다. 부군(府君:母남평조씨)는 절교위 조공 휘 서(節校尉曺公諱瑞)의 여(女)이시니, 일녀오남(一女五男)을 낳으시니 여(女)는 조응경(趙應慶)에게 출가(出家)하였고, 장남(長男윤명(胤明),(2男윤종胤宗),(3男윤관胤寬),(四男윤순胤純),(五男윤선胤善)이며,증손(曾孫)은 약간인이다. 때는 가정계해(嘉靖癸亥1563년) 四月 日. 고애자(孤哀子:상중에아들을칭하는말) 윤명(胤明)은 대강 추록(追錄:기록)하여 지(誌)를 쓴다.
윤명(胤明)할아버지께서는 선조임금의 사부이셨고,연산군때 안타갑게도 돌아가신 15세 훈(訓:1498년卒)할아버지의 아버지(父)14세충인(忠仁:1504년)돌아가시게 됩니다. 여기서 중종반정을 이야기하지않을수가 없습니다. 중종의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따님이고,신수근은 14세 충인(忠仁)의 사위 이며.연산군과는처남남매지간입니다. 그러나 훈(訓)할아버지는 연산군의폭정에1498년김종직의 조의제문사건때에 소릉복위(문종의비:현덕왕후권씨)묘 를보살피라는 충간을하다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1504년갑자사화(페비윤씨:연산군생모)사건때에 모든 사림(선비)들이 폭정을 견디지못할 때, 14세 충인(忠仁)할아버지께서는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변군(邊郡:가족이흩어짐)으로 이사하여 살게하였으며, 모든책임을지시고 사위인 신수근앞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때에 신원이 복관이 되면서 소위장군부군 16세 곤(昭威將軍府軍諱鯤)자손록용(子孫錄用:대를이음)의 명(明)을 내리었다. 전국에 흩어져 참의공파후손들이 살아가게되는 동기입니다.
연산조때 무오.갑자사회를 거치면서 충인 할아버지깨서 사위인 신수근앞에서 교형에 돌아가셨는데,! 그후,중종반정에 신원이 복관되면서 자손녹용하라는 명을 내리어 조선500여년동안 참의공파로 화합하며 선조의 제사를 모셔 왔는데, 일부 종현들의 혼란스러운 행위가 안타갑습니다. 위 의 내용은 고양시 선영에 계신 6위 선조님 행적에 대한 유록입니다. 우리 諱 叅議公 韓 磌 (휘 참의공 한전) 할아버지의 숭묘 사상이 헛되지않게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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