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위공계(校尉公系)

 
소감공 한정(少監公 韓 靖 : ? 毅宗朝 6世)
고려 의종(毅宗)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정(靖)이고 또는 정(晸)이며 예빈경공 후지(禮賓卿公 侯抵)의 아들이요 교위공 석(校尉公 奭)의 손자이다.
의종 3년(1149) 11월, 사신으로 금(金)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는데, 그때 허 순(許 純)은 방물(方物 : 特産品)을 바쳤다 이 때 고려는 금나라와 친밀관계에 있었으므로 양국의 사신이 빈번히 왕래하며 서로 절일(節日)에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던 것이다.
동왕 5년(1159) 8월, 간관(諫官)과 시어사 김 양(侍御史 金 양) 등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시사를 논하여 3일간 간하였으나 회답하지 않았다가 며칠 후 성재(省宰)가 모두 죄를 빌며 정사를 보지 않고 있자 왕이 중서시랑평장사판이부사 문공원(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文公元)을 비롯하여 간관 김자의(諫官 金子儀), 윤인첨(尹麟瞻), 대관 최윤의(臺官 崔允儀), 한 정 등 14인을 불러 일을 보도록 위유(慰諭)하였다.
어느 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재임중 이원응(李元鷹)과 서로 틈이 생겨 파직되었더니 왕이 축리(祝釐 : 神에게 諸王의 복을 비는 것)할 곳을 삼고자 따로 불우(佛宇)를 인재원(仁齋院)에 창건할 때 이원응은 이미 죽고, 한 정이 복직되어 그 공사를 인계받아 완성하니 그 공으로 은(銀)과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김돈중(金敦中)이 아우 돈시(敦時)와 함께 아버지 부식(富軾)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를 증수하고 한 정과 함께 한결같이 복을 비니 왕이 이들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경(卿)들이 과인(寡人)에게 복을 돌린다 하니 심히 가상하도다. 짐이 장차 가서 보겠노라”하였다. 동왕 6년(1152) 4월, 내시 윤언문(內侍 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 가산(假山)을 수창궁(壽昌宮)북원(北園)에 쌓고 작은 정자를 그 곁에 지어 만수정(萬壽亭)이라 이름하고 누런 비단으로 벽에 입혀 사치를 다하여 사람의 눈을 현혹케 하였다. 어느날 임금이 이 정자에서 연회하고 파한 뒤 우연히 가산이 무너지고 암닭이 우는지라 시어사 한 정(侍御史 韓 靖)이 어사중승 고영부(御史中丞 高塋夫)와 최균심(崔均深) 등과 함께 합문에 엎드려 3일 동안이나 윤언문과 한 취(韓 就), 이대유(李大有) 등을 내치도록 청하고, 또 우간의 신 숙(右諫議 申 淑)과 급사중 임 경(給事中 林 儆)이 상소하여 왕이 마지 못하여 쫓아 내쳤다.
그 후 19년(1165) 4월에 이르러 왕이 관란사에 행차하였는데, 이에 앞서 한 정과 김돈중 등이 북쪽 산이 빨갛게 벗겨져 초목이 없음을 보고 백성을 동원하여 송백(松柏)과 삼회(杉檜)와 기화(奇花), 이초(異草)를 심고, 단을 쌓아 어실(御室)을 지어 단청으로 장식하였으며,축대와 섬돌도 모두 괴석으로 쌓았더니, 이에 이르러 왕과 재상들이 잔치를 베풀어 흡족히 즐기고, 김돈중, 김돈시, 한 정에게 백금, 비단 등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벼슬은 소부소감(小府少監)에 이르렀다.
배위(配位) 교동 전씨(喬桐 田氏)는 동정 화공(同正 和恭)의 따님이며 아들은 검교호부상서 경립(檢校戶部尙書 敬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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