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부사공 한후유(府事公 韓後裕 : 肅宗 39年(1713) ∼ 正祖 15年(1791) 26世)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효자로 자는 백창(伯昌), 대사헌공, 증 좌찬성 용모(大司憲公 : 贈左贊成 : 顯暮)의 아들로, 진사공 · 증 영의정(進士公 · 贈 領議政 : 師范)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청송 심씨(靑松 沈氏)니 목사공 봉휘(牧使公 鳳輝)의 따님이다. 영조 23년(1747)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다섯 고을의 수령과 돈녕부도정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순조조(純祖朝)에 아들 익정공 용구(翼貞公:用龜)의 현달(顯達)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은 평소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글을 지어 명산(名山)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애처로웠다.
 할머니 유씨(兪氏)와 어머니 심씨가 모두 고령(高齡)을 누렸는데 자주 병석(病席)에 누웠다. 공도 이미 늙고 아들 넷이 곁에 있었으나 대신 시중을 들게 하지 않고, 조석(朝夕)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물러가라고 명하면 물러나와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자주 침실(寢室) 밖에 가 기미를 살피다가 코 고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물러나왔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만나면 흰 수염에 성에가 엉기기도 하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니 좌찬성 문충공(文忠公 : 翼洙)의 따님이다.
 슬하에 아들 넷을 낳았으니 장남은 감사공(監司公 : 用和)요 2남은 길채공(吉哉公 : 用鼎)증 참판이고 3남은 참봉공(參奉公 : 用中) 증 판서공인데 사문공(士問公 : 好裕) 증참판에게 계후 입양되었다. 4남은 영의정 익정공(翼貞公 : 用龜)이다.
 位置 : 龍仁郡 南面 倉里 先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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