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록(現世錄)

 
기옥공 한기석(奇玉公 韓琦錫 : 光武 4年(1900)∼1974, 30世)
공(公)의 휘(諱)는 기석(琦錫)이요 자(字)는 기옥(奇玉)이니 도사공(都事公 :  章敎)의 아들로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이며 충정공 (忠靖公 : 應寅)의 11대 (代)손이다. 공은 1954년도 정기총회에서 청주한씨 중앙종친회 3대회장으로 선임되어 1974년도까지 4, 5, 6, 7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당시 우리나라 정세(情勢)는 6.25전란(戰亂) (50.6.25∼53.7.27)으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되지 않고 불안(不安)할 때였다. 휴전선(休戰線)을 눈앞에 두고 언제 또 전란이 재발(再發)할 지 몰라 공포감(恐怖感 :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 가족을 잃었거나 행방조차 몰라 비애(悲哀 : 슬품과 서러움)하는 사람, 영양실조와 생계(生計)에 허덕이는 사람, 구걸(求乞)하며 노천숙식(露天宿食 : 한데서 먹고 잠)하는 사람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참으로 비참(悲慘)한 지경이 었다. 이러한 실정(實情)이므로 사무실을 마련할 수 없어 공의 사무실을 겸용(兼用)하였다. 재정난(財政難)으로 큰 사업실적은 없으나 본회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종친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종친회로서의 위선지성(爲先之誠)을 다하여 시조태위공(始祖太尉公), 전남 영광의 예빈경공(禮貧卿公 : 光胤), 문혜공(文惠公 : 康), 제학공(提學公 : 謝奇) 부군(府君)의 묘소수호(墓所守護)와 세향봉행(歲享奉行), 위토관리(位土管理)등을 묘하(墓下)에 있는 후손들에게 자율적(自律的)으로 솔선(率先) 운영케 하는데 노력하였고, 1971년도 정기총회에서 시조재실보수, 대동보, 간행 등을 결의하고 자금조성을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당시는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후임 회장들이 이를 실행한 공로는 지대하다 할 것이고 시작이 반이라고 공의 노고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배위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니 두복(斗馥)의 따님이고 슬하에 아들 창수(暢洙)가 있다.

 
번호     이 름 조회
41 한탁채 3861
42 한상국 3913
43 한종건 3919
44 한화갑 3944
45 한양순 3949
46 한주석 3979
47 한신 4003
48 한석범 4016
49 한진희 4020
50 한청수 4023
51 한환 4025
52 한희석 4028
53 한기석 4159
54 한광석 4273
55 한승의 4342
56 한필수 4351
57 한갑수 4404
58 한승수 4442
59 한병기 5130
60 한석봉 6169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