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윤공 한억호(判尹公 韓億虎 : ?~肅宗朝 22世)
公은 숙종(肅宗) 때의 문신으로 휘(諱)는 억호(億虎)이다. 증 통정대부 좌승지 단(贈 通政大夫 左承旨 단)의 아들이요 판관공 의길(判官公 宜吉)의 손자이며, 양무공 교(襄武公 嶠)의 증손(曾孫)이다. 유년(幼年)서 부터 영민(潁敏 ·  銳敏)하여 15세에 경사(經史)에 능통(能通)하고, 문학(文學)에 숙달(夙達)하더니 일찍 문과에 급제하였다. 크고 작은 여러 벼슬을 지내다 숙종조(肅宗朝)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한성판윤(漢城判尹 正二品)을 지내며 선정(善政)하니 백성(百姓)들의 마음이 편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의 붕당(朋黨 : 理解나 主義 따위를 함께하는 사람끼리 뭉친 당파 동아리) 상쟁(相爭)으로 연로(年老)에 향리(鄕里)로 돌아와 향학(鄕學)에 힘쓰다 졸하였다.(年代 未詳) 배위(配位)는 정부인 경주 김씨(貞夫人 慶州 金氏)이고, 아들은 참봉 언복(參奉 彦福)이다.
公이 숙종조(肅宗朝)에 졸하니 호서지남(湖西之南)에 진당산(鎭唐山)이 위연숭고(巍然崇高)하여 보령(保寧)의 진(鎭)이 되었다. 남(南)으로 일강지허(一崗之許)에 산수가려(山水佳麗)한 관창리 향양 명계 후록 자좌(寬倉里 向陽 鳴鷄 後麓 子坐)에 안장(安葬)되고 배위(配位) 정부인 경주 김씨(貞夫人 慶州 金氏)는 동원 인좌(同原 寅坐)로 쌍조(雙兆)이다. 동묘역은 지세(地勢 : 金鷄抱卵 : 닭이 알을 품고 이는 형국)로 인(因)하여 석물(石物)을 못 쓰게 됨에 따라 자손들이 안타까워 했다. 수년 동안 종의(宗議)에서 거론(擧論)된 바 묘에서 한참 아래인 고속도로 위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자는 중론(衆論)에 따라 1997년 5월에 그 숙원(宿願)을 풀게 됐다. 1997년 5월 양무공십삼세손성균관전학 진호찬(襄武公13世孫成均館典學 震鎬撰)과 서울대학교교수문학박사상갑 서(서울大學敎授文學博士相甲 書)로 청주한씨판윤공파종친회수립(淸州韓氏判尹公派宗親會竪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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