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록(現世錄)

 
총장공 한격만(總長公 韓格晩 : 光武 3年 (1899)∼1985 31世)
공(公)은 청주한씨중앙종친회 초대회장(淸州韓氏中央宗親會 初代會長)이다. 휘(諱)는 격만(格晩)으로 석연(碩淵)의 아들이오 진두(鎭斗)의 손자이며 판윤공 금강(判尹公 金剛)의 20대손이고, 예빈윤공 연(禮賓尹公 連)의 24대손이다.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용락(龍洛)의 따님이다. 공은 광무(光武)3년(1899년) 7월 5일 함경남도 정평군 문산면 동천리(咸鏡南道 定平郡 文山面 東川里)에서 태어났다. 1924년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26년 일본 고등문관사법과(日本 高等文官司法科)에 합격하고 부산지법(釜山地法)에 근무하다 사법관시보(司法官試補)에 올랐다. 뜻한바 있어 1929년 함흥(咸興)에서 변호사개업(辯護士開業)을 하였으나 왜정(倭政)때라 우리 민족의 앞날을 걱정한 나머지 민족의 권익(權益)을 찾기 위해 변호사 김병로(金炳魯), 허 헌(許 憲) 등과 애국운동(愛國運動)을 벌였다. 유명한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 단천, 정평농민조합사건(端川·定平農民組合事件)등에 무상으로 변론(無償辯論)하였다. 1945년 8.15 광복(光復)후에는 김병로(金炳魯) 등과 같이 민주사법제도(民主司法制度)를 확립(確立)하는데 힘썼으며 1948년 서울지방법원장(地方法院長), 1952년 대법관(大法官)이 되었다가 대검찰총장(大檢察總長)에 이르렀다. 1955년 변호사 개업(辯護士開業)을 1961년 대한변호사 협회장(大韓辯護士協會長)으로 재임하였다. 이와같이 공사(公事)가 바쁜 中 公은 종사(宗事)에도 크게 관심을 가진 바 있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5년여동안 청주한씨 종앙종친회장(淸州韓氏中央宗親會長)으로서 8.15 광복(光復)후 종친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功獻)하였다. 공이 86세의 수(壽)를 누리고 1986년 1월 15일 타계(他界)하였다. 공(公)이 초장지(初葬地)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월리(京畿道 華城郡 台安邑 半月里)224번지였다. 그 후 정부시책(政府施策)에 따라 철원군 서면 사리 목련공원 삼단지(鐵原郡 西面 四里 木蓮公園 三團地)로 이장(移葬)하였는데 배위(配位) 전주 최순일(崔舜一)묘와 쌍조(雙兆)이다. 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이북(以北)에서 졸하였다.

 
번호     이 름 조회
1 한필수 4324
2 한근조 3377
3 한석범 3996
4 한엄회 3427
5 한종건 3905
6 한국원 2942
7 한통숙 3444
8 한태일 3284
9 한동석 3418
10 한희석 4013
11 한태연 3557
12 한옥신 2915
13 한상준 3568
14 한건수 3425
15 한양순 3929
16 한신 3993
17 한격만 3644
18 한규복 3484
19 한기석 4129
20 한경직 3651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