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공 한영(正惠公 韓 泳 忠烈王 元年(1275)∼忠肅王 5年(1336) 9世)
공(公)은 충숙왕조(忠肅王朝)와 원(元)나라의 문신이다. 휘(諱)는 영(泳)이고 일명(一名) 영(永), 자(字)는 정보(貞甫)로 제학공 사기(提學公 謝奇)의 둘째 아들이며 문혜공 강(文惠公 康)의 손자이다.
충렬왕(忠烈王) 5년(1279) 3월 고려의 세신대가(世臣大家)의 자제들을 독로화(禿魯花 : 人質)로 원나라에 파견할 때 아버지 사기(謝奇)도 25인에 선발되어 형 악(渥)과 함께 따라갔다.
영(泳)은 나이 어려서 황제가 있는 곳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곳에서 글을 배우다가 충렬왕 29년(1303)에 선발되어 숙위(宿衛 : 皇帝를 보호하는 親衛兵)에 충군(充軍)되고 4년 후 인종(仁宗) 잠저(潛邸 : 임금이 오르기 전에 살던 邸宅)에 입시(入侍)하여 이듬해 승무랑자무고제점(承武郞資武庫提點)이 되고, 황경(皇慶) 원년(1313 : 충선왕 5년), 수무고사(壽武庫使)를 거쳐 이기고사(利器庫使), 금주자사(歸州刺使)를 역임하고 지치(至治) 2년(1322 : 충숙왕 9년)에 고주자사(高州刺使)가 되어 고을을 다스렸는데, 특히 고주는 변방에 이족(夷族)의 침략이 빈번하여 백성이나 물건들이 텅 비었고 생산이 없어 도둑이 만연하였다.
공(公)은 스스로 검속(儉束)하고 덕으로 이들을 정성껏 감화(感化)시키고, 그래도 도둑질을 고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법으로 가차없이 다스리니 드디어 고을에 평화가 이룩되었다. 충숙왕이 원에 오래 있었는데 간선 권한공(權漢功)이 왕위를 심왕(瀋王)에게 옮기려고 꾀한지라 시종하는 신하들이 절의(節義)를 다하여 보좌하기를 시종 한 마음으로 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채록(採錄)할만하다 하고, 동왕 14년(1327) 11월, 교지를 내려 정승 윤석(尹碩), 상당군 한 악(上黨君 韓 渥) 등 26인에게 1등공신을, 찬성사 정방길(贊成事 鄭方吉) 검교판서 한영(檢校判書 韓泳) 등 54인에게 2등 공신을 책훈(策勳)하고 전토(田士)와 노비를 주고 그 부모 처자에게 작(爵)을 미치게 하였다.
천력(天歷) 원년(1329 : 충숙왕 16년) 의주(懿州)로 전임하였다가 어사대(倒史臺)의 천거로 하서농북도 첨렴방사사(河西농北道 僉廉訪司事)가 되고, 2년 후 아중대부 합서 성원외랑(亞中大夫 陜西省員外郞)을 거쳐 또 2년(1333) 후, 하남부 총관(河南府 摠管)에 임명되었다. 공(公)은 비록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었지만 백성의 병되는 것을 물어서 이로운 것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제거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은폐된 것을 검사하고 잘 살펴서 실정(失政)을 파악하여 빈약한 사람에게는 조세를 면제해 주고 풍부하게 도와주었으며, 또 관사(官舍)를 새롭게 하며, 지방의 도로를 깨끗이 하고 마을에 문을 세웠으며, 농사와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고 약국을 세워 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천문 관측기를 설치하여 기상을 관측케 했다. 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학교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 하여 묘학(廟學)을 일신하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무릇 원근의 백성들이 오래토록 해결을 보지 못한 원통하고 억울한 일들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조사하여 모든 일이 정상(正常)을 얻었다. (至元)2년 (충숙왕 복위 5년 (1336) 관직에서 졸하니 집현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集賢直學士 亞中大夫 輕車都尉)에 중직되고 고양현후(高陽縣候)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정혜(正惠)이다. 이렇듯 공이 귀하게 되자 원나라 순제(順帝)가 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候)를, 조부 강(康)에게는 첨태상 예의원사 고양현백(僉太常 禮義院事 高陽縣伯)을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은 감찰어사 효선(監察倒史 孝先)과 무공고부사 중보(武功庫副使 仲輔), 급사동궁 문헌(給事東宮 文獻), 이부상서 중평(吏部尙書 仲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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