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훈)록(功臣(勳)錄) 

 
충장공 한백록(忠壯公 韓百祿)
 公의 諱는 백록(百祿)이요 字는 수지(綏之)이니 몽계공(夢溪公 哲沖)의 六代孫으로 조선 명종(朝鮮 明宗) 10년(1555)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비 굉(굉)이요 할아버지는 경인(敬仁)이다. 선조(宣祖) 13년(1580)에 25세로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바로 진잠현감(鎭岑縣監)에 배명(拜命)을 받고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을 권장(勸奬)하며 병기(兵器)를 수리보완(修理補完)하여 사졸훈련(士卒訓練)에 힘쓰던 中 지세포(知世浦) 만호(萬戶)에 제수(除授)되었다.   公이 남쪽 요새지(要塞地)를 맡아 튼튼히 방어하던 차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그 해 4월부터 6월까지 부산(釜山), 옥포(玉浦), 당포(唐浦) 등 해전(海戰)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戰死)한 정 발(鄭 撥) 장군(將軍)의 후임(後任)으로 公을 부산첨사(釜山僉使)에 특별 제수(特別 除授)하였다. 이는 남방(南方)의 보루(堡壘)를 더욱 확고(確固)히 하자는 지휘부(指揮部)의 뜻이었고 따라서 公의 능력(能力)이 그만큼 특출하였음이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熾烈)하여 7월 17일 미조항(彌助項) 싸움에서 公이 전사(戰死)하였으니 충장공(忠壯公) 38세 때이다.
 미조항(彌助項)은 남해도(南海島) 동남쪽 끝에 위치하는 바 公이 적(敵)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하자 公의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충득(忠得)이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公의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春川那 西面 錦山三里 觀音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公의 配位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참봉(參奉) 겸(謙)의 따님으로 公과 합폄(合폄)이다.
 아들은 우천(佑天)이니 증직(贈職)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公의 행장(行狀)은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이익(金移益)이 짓고 시장(諡狀)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오재소(吳載紹)가 지었으며 비문(碑文)은 좌의정(左議政) 이경일(李敬一)이 지었다.
 公이 몰(歿) 후 선조(宣祖) 38년(1605)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二等에 책록(策錄)되었고 인조(仁祖) 6년(1628)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公에게는 영조(英祖) 28년(1752)에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정문, 또는 각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려지고 충장(忠壯)으로 증시(贈諡) 하였으며 순조(純祖) 8년(1808)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작(贈爵)되고 配位 成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가자(加資)가 내렸다.
  春川市 西面 芳洞1里
  강원도 춘성군 서면 금산 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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