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금위장공 한유기(禁衛將公 韓有起 : 中宗36年(1541)∼宣祖41年(1608) 20世)
공은 선조(宣祖)때의 무신이다. 휘(諱)는 유기(有起) 이며 초휘(初諱)는 유인(有仁)이다. 판관공 척(判官公 척)의 아들이며 교위공 수복(校尉公 壽福)의 손자이고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장성공 효원(章成公 效元)의 현손(玄孫)이며 찬성공 장손(贊成公 長孫)의 6대손이다.
공은 중종 36년(1541)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南楊州市 別內面 花蝶里)에서 태어났다.천성(天性)이 무예(武藝)를 좋아하더니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조(宣祖朝)때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일자 의거장수(義擧將帥)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내금장(內禁將 : 內禁衛將 조선 선조때 임금의 좌우(左右)에서 호위(護衛)를 맡아보던 군관(軍官))으로 출정(出征)하여 전전남하(轉戰南下), 승전(勝戰)으로 선조31년(1598) 11월 종전(終戰)을 맞았다. 왜적(倭敵)의 최후도망자(最後逃亡者) 적장 소서행장(敵將 小西行長)이 남해 노량진(南海 鷺梁津)을 빠져 도주(逃走)할 때 공이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회향(回鄕)치 아니하고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 청룡(慶尙南道 南海郡 二東面 席坪里 靑龍)에서 남해도(南海島)를 왜적(倭敵)으로부터 지키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 망향(望鄕)의 정을 그리우며 향학(鄕學)에 힘쓰고 난세(亂世)의 한(恨)을 자위(自慰)하다 선조(宣祖) 41년(1608) 68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문화유씨(貞夫人 文化柳氏)로 참봉 상필(參奉 尙弼)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정부인 남원 양씨(貞夫人 南原 梁氏) 이다. 아들은 첨정 돈(僉正 敦), 증 참판 경(贈參判 敬)이다. 공은 도산리 가청산 해좌(陶山里 加靑山 亥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비갈(碑碣)이 있었는데 난세병화(亂世兵禍)와 오랜 세월로 마멸(摩滅)되어 공묘의 아래에 있는 배양위묘(配兩位墓) 앞에 세우고 새로 묘비를 1976년 윤8월 세우니 후손(後孫) 규식(圭植)이 찬(撰)하고 성욱(性旭)이 서(書) 하였다. 慕鄕亭 創建記 입남해조(入南海祖) 가선대부 내금장공 한유기(嘉善大夫 內禁將公 韓有起)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京畿道 南楊州市 別內面 花蝶里)에서 세거(世居)하여 오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의거출전(義擧出戰)하여 이곳까지 도달(到達)하여 이동면 석평리 청룡(二東面 席坪里 靑龍)에 정착(定着)하니 환고향(還故鄕)못함에 그 모향지정(慕鄕之情)이 월야문천공(月夜問天空)하니 모향소식몽(慕鄕消息夢)이라. 무정안화열(無情雁化列)하고 초충명명충(草忠鳴鳴충)이니라.
이 지극(至極)한 한(恨)을 위안(慰安)하여 드리고 묘의(墓儀)를 갖추기 위한 종원(宗員)들의 정성(精誠)을 모아 이 정(亭) 영세영명(永世英名)하기를 바란다. 1993년 4월  일 건립 공의 배위(配位) 정부인 문화유씨(貞夫人 文化 柳氏)와 정부인 남원 양씨(貞夫人 南原梁氏)의 묘(墓)가 각각(各各) 공묘(公墓)의 하조(下兆)에 있는데 공묘에 있던 묘갈(墓碣)을 1976년 윤 8월 개수비(改竪碑)와 동시일(同時日)에 이곳에 이수(移竪)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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