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한철수(韓哲洙)
公의 호(號)는 이당(治唐)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특파원(特派員) 강옥진(姜玉珍)과 대한청년단 연합회 서기 유건혁(柳健赫)과 같이 군자금모금(軍資金募金)과 기관조직(機關組織) 최승기(崔承基)와 같이 독립신문(獨立新聞), 청년지(靑年誌) 등을 배포(配布) 1919년 12월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대한청년단연합(大韓靑年團聯合)에 가입(加入)하고 그 다음 해 아버지 흥동(父親興東)이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당하고 3년 집행유예, 1920년 7월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통합(統合) 후 제2영 제1대대 부관(副官)으로 활약.
1921년 4월 사령부특파원(司令部特派員)으로 김창곤, 신계관(金昌坤, 申啓寬)과 같이 황해, 평안(黃海, 平安) 양도에 출동하여 군자금모금(軍資金募金)과 기관조직(機關組織)에 활약하다가 의주교외(義州郊外)에서 일본헌병(日本憲兵)과 교전(交戰) 2명을 사살(射殺)하고 동년 7월 김창곤(金昌坤)과 같이 환인지방(桓仁地方)에 출동하여 지방 대원 3인과 같이 달아나는 왜적을 토벌하는 등 활동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일본(日本) 중국군(中國軍) 대부대와 충돌하여 한명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어 김창곤(金昌坤)과 같이 사형언도(死形言渡)를 받고 1922년 평양에서 2심(二審) 때 4년형을 받고 경성(京城 : 서울)에서 1926년 출옥하여 오병섭(吳秉燮)과 같이 해삼위(海蔘威)로 탈출하려다 제지(被禁)당하여 일본경도(日本京都)로 가서 學籍을 두고 신간회 경도지부(新幹會 京都支部)에 가입하여 비밀결사 철성단(秘密結社 鐵聲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월여간(月餘間) 구금(拘禁), 1929년 귀국 1933년 만주길림(滿洲吉林)에서 예수교 장로(長老)가 되고 8.15광복 후 귀국(歸國)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번호     이 름 조회
41 한창형 2424
42 한동근 2436
43 한덕용 2560
44 한덕유 2305
45 한도원 1954
46 한병기 2749
47 한시대 2322
48 한철수 2395
49 한재열 2357
50 한춘 2306
51 한이경 2472
52 한봉식 2471
53 한진석 2327
54 한익현 2375
55 한영희 2395
56 한우종 2449
57 한기동 2359
58 한위건 2649
59 한봉민 2376
60 한형석 2378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