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 한광경(判書公 韓光경 : 영조1년(1725)~정조 21년(1797) 25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긍(子肯), 판사, 봉조하공(判事, 奉朝賀公 : 師得)의 아들로 증 판서공(贈 判書公 : 師一)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니 증 참판공(贈 參判公 : 配漢)의 손자가 되며 어머니 증 정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는 대사헌공(大司憲公 : 晸)의 따님이다.
영조 29년(175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42년 호조정랑(正郞)에 올랐다. 동왕 50년 식년 시문과(式年 詩文科)에 갑과 제2인자(甲科 第2人者)로 급제하니 탁월(卓越)한 실력(實力)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등용(登用)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정조 17년(1793)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이듬 해 다시 형조판서에 복직하여 동왕 19년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工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春秋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등을 역임하였고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배위 정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는 도사공(都事公 : 復陽)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을 생하니 장남은 효중공(孝仲公 : 曾裕)이고 차는 회중공(晦仲公 : 馨裕)이며 차는 참판공(參判公 : 耆裕)이다.
공은 오한(吾韓)의 대동족보(大同族譜 : 四校己酉譜)를 편찬(編纂)하였고 정조 17년 (1793) 양절공(襄節公 : 確)의 신도비 대석(神道碑 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솔선(率先)하여 이를 추진(推進)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많은 노력(努力)을 한 분이다.
 
位置 : 忠南 靑陽郡 南陽面 興山里 山12
歲享日 : 陰 10月 17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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