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간공 한상경(文簡公 韓尙敬 : 1360 ~ 1423 12世)
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文臣)이다. 자(字)는 숙경(叔敬)이요 또 중경(仲敬)이요 호(號)는 신재(信齋)이니 문경공(文敬公) 수(脩)의 아들이요 평간공(平簡公) 공의(公義)의 손자이다. 어머니, 정녕택주(靜寧宅主)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 적(權 適)의 따님으로 공(公)은 四兄弟 中 셋째이다. 고려 우왕(高麗 禑王) 8년(1382)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의좌랑(禮儀佐郞)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공양왕(恭讓王) 2년(1390) 1월에 비로소 경연(經筵)을 열고 공을 검토관(檢討官)으로 삼고 진강(進講)에 힘썼다.
 1392년 4월에 밀직사좌부대언(密直事左副代言)이 되었을 때 국체(國體 : 나라가 成立한 상태 : 國家의 性格)가 바뀌니 곧 조선(朝鮮)이 개국(開國)(1393)함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중추원 도승지(中樞院 都承旨),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임(任)할 때 서원군(西原君)에 봉(封)해졌다. 다시 경기, 황해, 강원(京畿, 黃海, 江原) 감사(監司)를 지내고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호조, 공조 (戶曹工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太宗 18년(1418)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세종(世宗) 5년(1423) 64세로 졸(卒)하니 王은 3일간 조정(朝廷)을 휴무(休務)케 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시호(諡號)를 문간 (文簡)이라 하였다. 풀이해 말 하면 문간(文簡)의 문(文)은 근학호문(勤學好文)의 뜻이고, 간(簡)은 일덕불해(一德不懈) 의 뜻이다.
 아들은 함길도 도관찰사 겸 함흥부윤(咸吉道 都觀察使 兼 咸興府尹)을 지낸 청산군 (淸山君) 혜(惠)이다.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에 보면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하여 공(公)에게 이르되 “내가 큰 왕업(王業)을 이어 받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 모르겠소. 이 때문에 실로 생각이 난감하기만 하네" 하니 공(公)이 대답하길 "古人이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이어 받아 그 전에 왕업을 받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능히 왕업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진실로 우리 동방의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알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실행(實行)하기가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 임금은 이와 같은 말을 가상히 받아 들였다 한다.
 
 公이 64세에 졸(卒)하니 太宗이 제문(祭文)을 내렸다. "王이 이르기를, 어진 신하 (臣下)의 개국(開國)의 공훈(功勳)은 고금(古今)없이 막중하고 임금의 보공지전(報功之典)은 살아 생전과 죽은 뒤가 어찌 다르겠는가”하고 경(卿)은 사조(四朝)의 귀감(龜鑑)이라 찬탄(讚嘆)하였다. 中, 下略 함.
 문간공이 世宗 5年(1423) 음 3월 7일에 졸하여 나라에서는 부의(賻儀)로 예(例)에 따라 미두(米豆) 共히 七十石과 한지(紙) 150卷을 내렸고 초장지(初葬地)는 광릉(光陵)이었으나 후일 세조(世祖) 임금이 승하(昇遐)하여 국장지(國葬地)로 택정(擇定)되어 지금의 위치로 천묘(遷墓)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있을 뿐이다.
 公에게 시호(諡號)를 문간(文簡)이라 내리고 영세부조(永世不조)의 전례(典禮)를 내리니, 바로 지금의 사당이 문간공을 모시는 사우(祠宇)이나 원래(元來)의 사당은 퇴훼(頹毁)하여 광복(8 · 15 光復) 후에 후손이 성금을 모아 중건(重建)하고 문간공과 배위 (馬韓國大夫人) 해주 오씨(海州 吳氏)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사당(祠堂) 제사(祭祀)는 문간공의 기일(忌日) 음 3월 7일과 배위의 기일인 음 4월 17일에 그리고 정월 1일에 다례를 드린다.
 
 조선인 호부(朝鮮人號簿) 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씨(王氏) 자손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자 公이 구(救)하여 사면(赦免)케 하여 주어 이로써 전조(前朝 : 高麗朝)에 보답하였다. 이는 문간공이 고려 우왕(禑王)때 등과하여 조선조에 와서 개국공신이 되어 행한 바다. 또한 이 첨(李 詹)이 문간공의 호(號) 신재(信齋)를 풀이한 글에서 한공(韓公)은 마음 가짐이 성신(誠信)하고 돈독(敦篤)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정직하고 성실하며 웃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어거하는데 성의와 의리(義理)를 다하였다. 신(信)을 지켜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 서재 편액(書齋 扁額) 에 信字를 썼으니 그 심지(心志)가 독실하고 그 강학(講學)이 정근(精勤)하고 그 실행 (實行)이 지처(至處)하였다고 찬사하였다.
 公의 신도비(神道碑)는 광릉(光陵)에서 이곳 양주로 천묘(遷墓)할 때 뗏목으로 옮기다가 가까운 여울목에서 급류로 인해 유실(流失)되었다는 전설(傳說)이 있으나 고증(考證)할 길 없고 광복 후 갑자(1984)에 후손 한욱동(韓旭東)이 비문을 짓고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配位 馬韓園大夫人 海州吳氏와 上下兆 이다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1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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