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군 혜(淸山君 惠 : 1403~1431 13世)
公은 조선조 태종(太宗) 세종(世宗) 때의 문신(文臣)으로 호(號)를 송재(松齋)라 한다.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선조 개국공신(朝鮮朝開國功臣) 상경(尙敬)의 아들이요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호(號) 유항(柳巷) 수(脩)의 손자이다. 12세에 초시(初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종부서령(宗簿暑令)으로 15세에는 대과(大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전사시 소윤 보문각지제교(典祀寺 小尹 寶文閣知製敎)에 제수(除授)되고, 세종 2년에 사간(司諫) 우부대언(右副代言), 동 5년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는데,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는 사이 한번도 외출한 적이 없다. 병오(丙午 : 1426)에 병조참의(兵曹參議), 무신(戊申 : 1428)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오르고 청산군(淸山君)에 봉군(封君)되어 동년 10월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어 명(明) 나라에 동지(冬至), 하절(賀節) 사신(使臣)으로 갈 때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모관(毛冠)과 면의(綿衣)를 내려 추운 눈길에 잘 다녀오라고 했으니 公이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만 하다. 1429년에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되고 이듬해 12월에 함길도(咸吉道 : 咸鏡道) 관찰사 겸 함흥부윤(觀察使 兼 咸興府尹)에 임명되었다. 公이 함경도민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변방(邊方 : 地方의 요새)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때 슬프게도 29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뜨니 王이 부음(訃音)을 듣고 특사를 보내 부의(賻儀)를 전하고 조문(弔問)하였다.
公의 묘소를 금곡리에 정하고 장례(葬禮)를 치를때 함경도 백성들이 公의 선정(善政) 을 감사하여 흙 한줌씩을 가지고 와서 봉분(封墳)을 쌓고 위령(慰靈)의 예를 다하였다.
청산군의 초배(初配)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요 계배(繼配)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로 초배 성주 이씨(初配 星州 李氏)는 처음 적성(積城)에 장례(葬禮)하였는데 1986년 청명절에 청산군(淸山君) 묘(墓)에 합폄(合폄) 천묘(遷墓)하고 계배(繼配)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公의 묘(墓) 계하(階下) 독묘(獨墳)이다.
公의 묘비(墓碑)가 오랜 풍진(風塵)속에 심히 마모(磨耗)되어 1996년 3월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새로 세웠다.
公에게는 五男 三女가 있는데 長男은 原從功臣 檢校參判 繼胤이고 次는 文襄公 繼美요, 次는 文靖公 繼禧요, 次는 戶曹參判 繼善이요 季는 襄平公 繼純이다. 次子 文襄公이 받은 丹書 鐵券敎旨에 依하면 文襄公의 功으로 淸山君에게는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西原府院君이 追贈되어있다고 되어 있다.
公의 신도비(神道碑)는 본래 없었으나 1987년 후손이 성금을 모아 문간공 사우(文簡公 祠宇) 앞 뜰에 세웠다.
 
位置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125번지
시향(時享):음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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