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록(淸白錄)

 
효헌공 한형윤(孝憲公 韓亨允 : 1470 ~ 1532 16世)
 조선 중종(朝鮮 中宗) 때의 문신(文臣)으로 이판공(吏判公) 절(절)의 아들이요 서원부원군 문양공(西原府院君 文襄公) 계미(繼美)의 손자이다. 자(字)를 신경(信卿)이라 하고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님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성준(成俊)의 따님으로 公이 출생(出生)한 지 삼개월(三個月)만에 세상(世上)을 떠나니 외조부(外祖父) 명숙공(明肅公 : 成俊의 諡號)의 지극(至極)한 보살핌으로 자랐다. 나이 10세에 서거정(徐巨正)이 公의 시귀(詩句)를 보고 크게 칭찬(稱讚)하면서 감복(感服)하였다.
 公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合格)하여 대학(大學)에 入學하여 學問에 힘을 썼고 경서 장귀(經書 章句)를 외우면서 다녔으며 일과표(日課表)를 만들어 놓고 독서(讀書)하였다. 나이 20세에 成宗 임금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전시(殿試 : 御殿試라고도 함)를 치뤘는데 二等으로 뽑히었으나 成宗이 一等보다 글이 좋다고 하여 公이 一等으로 뽑히니 사림(士林)이 부러워했다. 성종 임자(成宗 壬子 : 1492)에 대과(大科)에 병과 제5인(丙科 第五人)으로 급제(及第)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 때 成宗이 무예(武藝)에 능(能)한 문신(文臣)을 뽑아 선전관(宣傳官)을 삼을 때 公도 이에 뽑혀 참의(參議)가 될 때까지 겸(兼)하였다.
 1497(丁巳)년 가을에 중시(重試 : 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으로 이 시험에 급제한 사람을 당상관 정삼품(堂上官 正三品)의 위계를 준다)에 급제하여 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刑曹正郞 兼 春秋館 記注官)이 되었다.
 成宗이 왕희지(王羲之) 서첩(書帖)으로 文官에게 서예(書藝)를 시험(試驗)할 때 公도 합격(合格)하여 이 서첩(書帖 : 十七帖)을 받았다.
 1498년 가을에 함경도어사(咸鏡道御史)가 되고 1499년에는 경기도지방(京畿道地方)을 가을에는 어사(御史)로서 경상우도 십포(慶尙右道 十浦)의 불법사건(不法事件) 등을 처리하였다.
 1502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 1503년 겨울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전라도 만경(全羅道 萬頃)에 유배(流配)되었으나 이는 무함(誣陷)에 의한 것으로 가려졌다. 1509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510년에 한성좌윤(漢城左尹), 1511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監司), 이어서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다. 호조, 공조(戶曹, 工曹) 참판(參判)을 지내고 경기, 강원 감사(京畿,江原 監司)를 지내면서 떠날 때에는 公의 선정(善政)에 감화(感化)된 地方사람들이 유임(留任)을 진정하는 사례도 많았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시절에 선정(善政)을 기려 송경(松京 : 開城)이 생긴 이래 첫째로 손꼽히는 인물(人物)이라고 칭송했다.
 1519년 12월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고 1521년 5월에는 등극부사(登極副使)로 北京에 다녀오고 1522년 가을에 다시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고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와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公이 한성 형조(漢城 刊曹)에 오래 있었어도 淸白하고 너그러우며 사정(私情)에 치우치지 않아 옥사(獄事)에 공평(公平)하기로 드문 일이었다고 일렀다.
 1530년 여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는 公의 외조부(外祖父 : 明肅公)가 함경감사를 세 번이나 지낼 적에 公이 이미 이 지방(地方) 사정(事情)에 잘 통하고 청덕(淸德)이 있는 형편이므로 결원(缺員)이 있을 때마다 이조(吏曹)에서 천거(薦擧)함이다.
 1532년 함경감사(咸鏡監司)에서 물러나 돌아올 때 병을 얻어 끝내 소생(蘇生)치 못하고 그 해 12월 10일 하세(下世)하니 향년(享年)이 63세였다. 조정(朝廷)에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2일간 휴무(休務)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효헌(孝憲)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公은 天性이 强直하여 不義와 타협(妥協)함이 없고 燕山君과 君臣의 사이라도 直諫을 서슴치 않아 노여움을 산 일로 좌천(左遷)을 당하여도 굴(屈)하지 아니했고, 유배(流配)되어도 구명(救命)치 않았다. 그러나 淸白으로 奉公하여 조선 개국 이래 우리 한문(韓門)에서는 처음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公의 당초의 묘(墓)는 서울시 도봉구 창동(舊 楊州那 蘆海面 海村里)이었으나 1971년 봄 이곳 高陽으로 면봉(緬奉)하였다. 시향(時享)은 음력 10월 7일이다.
 舊 墓儀(碑, 床石, 文官石, 望柱, 長明燈 外 一切)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亂時를 겪고 兵禍로 일실(逸失)되어 現在는 改竪한 墓碑이다.
 公은 위선(爲先)하는 효성(孝誠)도 지극(至極)하여 아버님 이판공(吏判公)과 외조부(外祖父)의 祠堂을 모시고 香火를 드렸으며 神道碑를 세웠고 開城留守 在任 時는 유항 문경공(柳巷 文敬公 : 諱 脩) 以上의 墓碑가 없어 오래 되면 실묘(失墓)할 염려(念慮)가 있어 各 墳마다 墓碑를 세웠다.
 公이 全州 勢家인 최 열(全州 崔 冽)의 따님을 취(娶)하여 淸平尉 紀, 生員 維, 掌樂院 主簿 緯의 三兄弟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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