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현감공 한위겸, 배 하동 정씨 (縣監公 韓위謙, 配 河東 鄭氏 : ?∼宣祖30年(1597) 20世)
 공(公)의 휘(諱)는 위겸(위謙)이고 자(字)는 군측(君則)이다. 선무랑공 기(宣務郞公 기)의 아들이고 집의공 효우(執義公 孝友)의 손자이다.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일자 젊은 나이로 세파(世波)를 헤치고 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을 맞아 불행하게도 왜적(倭賊)에게 붙잡혔다. 이미 피신할 방책(方策)을 못찾은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왜놈에게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부(子婦)인 하동정씨(河東鄭氏)와 두딸과 함께 절벽(絶壁)에서 투신하여 물에 빠져 죽으니 선조(宣祖) 30년(1597) 9월 18일 이었다. 예조(禮曹)에 회계(回啓)한 절점계하(節粘啓下)에 이르되 현감 위겸(縣監 위謙)의 아들 선교랑 황(宣務郞 황) 등의 상소(上疏) 내용에 조모 나주정씨(祖母 羅州丁氏)와 전모 하동정씨(前母 河東 鄭氏)가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동일(同日) 순절(殉節)하였다고 정표 요청(旌表要請)도 하였거니와 광주 목사 이후원(光州牧使 李厚源)이 순찰사(巡察使)에 보고한 절정문(節呈文), 인조(仁祖)때 광주 목사 민응협(光州牧使 閔應協)도 정서(呈書)를 감사(監司)에게 보고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정려(旌閭)는 이루지 못했다. 공(公)의 배위 하동정씨(配位 河東 鄭氏)는 사과 원흥(司果 元興)의 따님이며 아들은 선교랑 황(宣務郞 황)이다. 공(公)의 배위(配位) 하동 정씨(河東 鄭氏)는 광주 송산 간좌(光州 松山 艮坐)에 안장 (安葬)되었고 공(公)의 묘가 광주 고덕동 선영하(光州 高德洞 先塋下)에 후배 평산신씨(後配 平山申氏)와 합조(合兆)였는데 도시 계획(都市計劃)에 따라 용성리(龍城里) 山 251-2 인좌(寅坐)로 삼합조(三合兆)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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