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선무랑공 한기, 배 나주정씨(宣務郞公 韓 기, 配 羅州 丁氏 : 明宗15年(1560) ∼ 宣祖30年(1597) 19世)
 공(公)의 휘(諱)는 기(기)이고 자(字)는 자장(子長)이다. 집의공 효우(執義公 孝友)의 아들이고 종부정공  원(宗簿正公 垣)의 손자이다. 공은 선무랑(宣務郞)을 지냈다. 이에 앞서 배위(配位)로 나주정씨 대사헌 윤복(羅州丁氏 大司憲 胤福)의 따님을 맞이하였다. 나주정씨는 명종(明宗) 15년(1560) 9월19일에 태어났다. 대대(代代)로 서울에 살다가 갑작스럽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였는데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이 낮으로는 산중(山中)에 은신하고 밤으로 보행 하다 불의(不義)에 적병(賊兵)이 내습(來襲)하니 정씨(丁氏)는 탈출(脫出)의 불가능함을 알고 단도(短刀)를 가지고 절벽에서 투신하여 유혈(流血)이 만면(滿面)하니 적병(賊兵)이 죽은줄 알고  버리고 갔는데 다행이 행인(行人)이 구제하여 보명(保命)하고 천신만고(千辛萬苦)로 광주(光州)에 와서 피난하니 효우동(孝友洞)은 그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왜적(倭賊)이 광주를 함락(陷落)하니 정씨(丁氏)가 자녀들을 거느리고 해안(海岸)으로 두류(逗류 :  머물러서 떠나지 않음)하다가 영광(靈光)에 이르렀으나 피신할 길이 어렵더니 한 아들이 불행하게도 적에게 잡혔다. 이미 피신할 방책(方策)을 못찾은 정씨(丁氏)는 끈으로 높은 나무에 목을 메었으나 끈이 끊기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왜놈에게는 더럽힐수 없다고 하여 자부(子婦)와 두딸과 함께 수십길 되는 절벽(絶壁)에 투신하여 물에 빠져죽으니 때는 선조(宣祖) 30년(1597) 9월18일이었다. 왜병에게 잡혔던 아들은 천행(天幸)으로 탈출하여 수소문(授所聞) 끝에 모친이 40일전에 절사(節死) 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지(死地)에 가보니 산사람과 같았다, 정씨(丁氏)의 정절(貞節)은 그 마을 에 마땅이 정려(旌閭하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타향(他鄕)에서 절사(節死)한 관계와 한문(韓門)의 힘이 부족하여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했다.
광주목사 이후원(光州牧使 李厚源)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되 이 절정문(節呈文)은 이 고을에 사는 전별제 신택(前別提 申澤)과 이정태(李鼎泰)와 참봉 유평(參奉柳坪), 생원 여응백(生員 呂應伯)등 87인의 정장(呈狀)으로 나주 정씨(羅州丁氏)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고 인조(仁祖) 22년(1644) 광주 목사 민응협(光州牧使 閔應協)도 진사 박충렴(進士 朴忠廉)등 101인의 정서(呈書)를 감사(監司)에게 보고한 바 있다. 아들은 현감 위겸(縣監 위謙)이다. 공과 배위(配位)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합조묘(合兆墓)가 선영하 경좌(先塋下 庚坐)에 있었는데 1982년 2월16일 도시 계획(都市計劃)에 따라 광주고덕동(光州高德洞)에 이장(移葬) 하였다가 (公州市 李川面 龍城里) 山 251-2 인좌(寅坐)에 합조(合兆)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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