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판관공 한경생(判官公 韓慶生 : 宣祖10年(1577)∼孝宗9年(1658) 19世)
공(公)의 휘(諱)는 경생(慶生)이고 자(字)는 자선(子善) 호(號)는 육우당(六友堂)이다.
첨정공 응문(僉正公 應文)의 아들이고 참찬공 복(參贊公 輹)의 손자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숙인 연안 김씨(淑人 延安 金氏)로 참봉 벽(參奉 壁)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10년(1577) 생이며 광해(光海) 5 년(1613)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현풍현감(玄風縣監)을 지내고 통훈대부 순천, 춘천부사(通訓大夫 順天, 春川府使)로 있었는데 치적(治蹟)이 있었다. 관직이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이르렀으나 광해정란(光海政亂)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어은동(漁隱洞)에 남하(南下)하여 몽선루(夢仙樓)를 짓고 아계수(阿溪水) 상산수(上山水)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였다. 경기좌도 수운판관(京畿左道 水運判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에 이르러 적(敵) 수십명(數十名)을 죽이고 이어 과천(果川)에 이르러서도 5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成立) 되었음을 듣고 통곡(痛哭) 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여러차례의 관직제수(官職除授)에 응하지 않았으며 청(淸)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 특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除授) 되었을 때는 오랑캐 연호(年號)의 교지(敎旨)라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십사현(同志十四賢)과 더불어 고향인 횡탄(橫灘)에서 문회(文會)를 설(設) 하였으며 효종(孝宗) 9년(1685) 2월 15일 82세로 졸하였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이다.
 배위(配位) 증 숙부인 흥성 장씨(贈 淑夫人 興盛 長氏)는 사촌 경세(沙村 經世)의 따님으로 무후(无后)이며 증 숙부인 평양조씨(贈 淑夫人 平壤 趙氏)는 동추 효원(同樞 孝元)의 따님이고 아들은 현감 유량(縣監 有良), 부사 용량(府使 用良), 통덕랑 익량(通德郞 翊良), 출척 석량(黜陟 碩良), 첨추 우량(僉樞 遇良)이다. 六友堂實記(육우당실기)가 있다.
공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홍곡리 용부동 간좌(三溪面 鴻谷里 龍釜洞 艮坐)에 안장(安葬) 하였다. 표석(表石)이 있으며 월성 이규헌(月城 李圭憲)이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하여 세웠다. 공(公)의 배 증 숙부인 평양조씨(配 贈 淑夫人 平壤 趙氏)는 숙종(肅宗)11년(1685)졸함에 시흥시 과림동(始興市 果林洞)에 홀로 안장(安葬) 되었다.
공(公)의 호(號)가 육우당(六友堂)으로 생전 거소(生前 居所)이며 공이 직접 건립( 直接 建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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