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사공 한만손(節度使公 韓萬孫 : ?~燕山君 9年(1503) 14世)
공은 조선조 성종(成宗) 때의 무신(武臣)이다. 휘(諱)는 만손(萬孫)이고 자(字)는 윤언(胤彦)이다. 판서공 서룡(判書公 瑞龍)의 다섯째 아들이고 청성군 승순(淸城君 承舜)의 손자이다.공은 타고난 성품(性品)이 고상(高尙)하여 범인(凡人)보다 뛰어났다. 형인 장손(長孫), 중손(仲孫), 종손(終孫), 천손(千孫)이 무과에 급제함에 힘입어 무과에 급제하니 국제(國制)에 따라 어버이의 품계(品階)를 올려주고 해마다 세미(歲米) 등을 지급받는 영광을 입었다. 공은 상국 허종(相國 許琮)이 추천하여 특별히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어 첨지(僉知)를 거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는 성종(成宗)때였다.
연산(燕山)이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무도(無道)한 일을 많이 하고 경기지역(京畿地域)을 유원지(遊園地)로 만들 때 교하(交河), 양주(楊州)의 선영(先塋)의 묘소가 금지구역(禁止區域)으로 들어감에 차마 어버이를 잊고 관록(官祿)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성주(星州)로 가서 숨어 살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 : 燕山君 4年(1498) 金日孫 등 新進士類가 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화를 입는 事件)때 내외형제(內外兄弟)인 한훤당 김선생(寒暄堂 金先生)이 희천(熙川)으로 귀양가자 좌의정 한치형(左議政 韓致亨)에게 편지를 보내 강직(剛直)한 말을 하였으나 다행히 화(禍)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당국자(當局者)의 저지를 더 받았다. 연산(燕山) 9년(1503) 12월 13일 졸하였다.
아들은 현감 휘(縣監 暉), 판관 성(判官 晟), 현영 돈(縣令 暾) 그리고 영(暎)이다.
공이 가암리 관동 장등(加岩里 冠洞 長嶝, 舊雲谷坊 冠洞) 자좌(子坐)에 안장(安葬)되었다.처음에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난세병화(亂世兵禍)와 오랜세월로 마멸(廳滅)되니 융희(隆熙 : 純宗의 年號) 후 18년(1927) 한식절(寒食節)에 16대 방손(傍孫) 가선대부, 궁내부 특진관, 전 성균관 대사성 한긍호(嘉善大夫, 宮內府 特進官, 前 成均館 大司成 韓肯鎬)가 찬(撰)하였다.
묘명(墓銘)에 이르기를 “궁마(弓馬)가 빛나고 시례(詩禮)에 독실하다. 현상(賢相)이 천거하니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네. 세상이 무도함에 국록을 부끄러워 하였네. 혼연히 성주에 내려와서 채식으로 만족하다. 누구와 이웃했는가, 한훤당(寒暄堂)선생이로다. 진심으로 교분하니 도의가 더욱 깊다. 정국(靖國)도 못보시고 갑자기 영면하셨네. 포부를 못다 펴니 후인들이 슬퍼 애석하다. 운곡(雲谷)이라 옛터에 고목만 푸르도다. 이 글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노라.”
공의 배위(配位) 숙부인 성주 이씨(淑夫人 星州 李氏)는 대사헌 흥문(大司憲 興門)의 따님으로 연산(燕山) 8년(1502) 6월 2일 공보다 1년 전에 졸하였다. 배위의 묘소(墓所)는 공묘(公墓)의 바로 후측(後側)에 있다.
절도사공 만손 경모재(節度使公 萬孫 敬慕齋)는 공묘하(公墓下)에 있으며 신유년(辛西年, 1921) 10월에 준공되었는데 8평이다.
 
節度使公(諱 萬孫) 墓
位置 : 慶尙北道 星州郡 碧珍面 伽岩里 冠洞 長嶝
歲享日 : 陰 10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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