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 한치응(判書公 韓致應 : 英祖 36年(1760)~純祖 24年(1824) 26世)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치응(致應)이고 자(字)는 계보(溪甫) 또는 계부(溪夫)이고 호(號)는 병산(병山)이다.
증 찬성공 광적(贈 贊成公 光迪)의 아들이고 증 이판공 세장(贈 吏判公 世章)의 손자이며 구암공 백겸(久菴公 百謙)의 7대손이고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贈 貞敬夫人 驪興 閔氏)로 참판 명인(參判 命寅)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英祖) 36年(1760) 9월 9일 생이다.
정조(正祖) 8년(1784)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바로 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관 가운데 문학에 뛰어나 시험관으로 뽑힌 문신)으로 뽑힌 뒤 1792년 홍문록(弘文錄) ·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같은 해 지평이 되고 1795년 관동 암행어사로 나가 원주, 영춘 등지의 창곡(倉穀) ·전정(田政) · 군정(軍政)의 부패상과 관리들의 비위 사실을 낱낱이 폭로하였다. 1797년 수찬, 교리를 거쳐, 집의를 역임한 뒤 1799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 兼 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純祖) 6년(1806) 신유사옥 때 관직을 추탈당한 채제공(蔡濟恭)의 신원(伸寃)을 청한 승지 심규로(沈奎魯)에 동조, 윤필병(尹弼秉) 등과 함께 연합상소한 사건으로 하여 삭출되었다. 1808년 다시 기용되었으나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무뢰배들의 난동사건이 있어 그들을 처벌한 결과 10여명이 곤장에 맞아 죽은 불상사가 발생하여 파직당하였다. 그뒤 1812년 이후 비변사제조와 대사성, 대사간,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817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돌아와서 한성판윤이 되고, 1820년 형조판서가 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1년 판돈녕부사, 병조판서, 빈궁당상(嬪宮堂上), 우참찬, 판의금부사 겸 한성판윤을 지낸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문(詩文)이 뛰어나 이유수(李儒修), 홍시제(洪時濟), 윤지눌(尹持訥), 정약전(丁若銓), 채홍원(蔡弘遠) 등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시로써 교유하였다.
저서(著書)로는 《병산집(병山集)》이 있다. 순조(純祖) 24년(1824) 10월 12일 65세로 졸하니 사림(士林)들이 회장(會葬)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 선산 김씨(貞夫人 善山 金氏)는 전적 명흠(典籍 明欽)의 따님이고 정부인 여산 송씨(貞夫人 礪山 宋氏)는 지상(之庠)의 따님이고 아들은 판서 진정(判書 鎭庭)이다. 공은 화도면 묵계 자좌(和道面 墨溪 子坐)에 안장(安葬)되었는데 배 정부인 선산 금씨(配 貞夫人 善山 金氏)와 합조(合兆)이다.
공의 배 정부인 여산 송씨(配 貞夫人 礪山 宋氏)는 순조(純祖) 7년(1807) 3월 23일 졸함에 화도면 묵계(和道面  墨溪) 공묘와 상하조(上下兆)이다.
 
位置 : 京畿道 南揚州市 和道面 墨溪子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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