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선생(萬海 韓龍雲 先生 : 1879~1944 33세)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格天), 법명은 용운 (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 卍海). 충남 홍성(洪城) 출신으로 도사공 응준(都事公 應俊)의 아들이며 첨정공 영우(僉正公 永祐)의 손자이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력하였다. 27세 때 다시 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 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36세 때 《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30세 되던 해에 안중근(安重根)의 장거가 있었는데, 그해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였다. 주로 동경(東京)과 경도(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여행 중에 3 · 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 린(崔 麟) 등과 교우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41세 때 3 · 1 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충돌이 있었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42세 때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47세 때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9세 되던 해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52세 때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 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 · 기강확립 ·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57세 때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 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단체인 만당 사건(卍黨 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입적(入寂)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회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묘지에 유골이 안장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 김동삼(金東三), 신채호(申采浩), 정인보(鄭寅普), 박 광(朴 珖), 홍명희(洪命憙), 송월면(宋月面),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었다. 배위(配位) 천안 전정숙(天安 全貞淑)은 도사(都士)의 따님이며 이의 아들은 보국(報國)인데 1950년 6 · 25전란시 행방불명(行方不明)이며 배 기계 유씨(配 杞溪 兪氏)의 따님인 영숙(英淑)이 성북동(城北洞)의 심우장(尋牛莊)을 지키고 있다.


만해선생(萬海先生)은 1944년 5월 9일 성북동(城北洞)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미아리 사설 회장장에서 다비(茶昆 : 시체를 火葬하는 일)된 뒤 망우동 묘지(忘憂洞 墓地)에 유골이 안장(安葬)되었다. 후배 기계 유씨(後配 杞溪 兪氏) 가 1965년 6월 25일 졸함에 우측에 안장(安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 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고 동작동 국립묘지(鋼雀洞 國立墓地)로 이장(移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유족(遺族)은 명당(明堂) 자리임을 내세워 사양하고 있다.

 


선생을 모신 만해사(卍海祠)는 先生의 생가(生家)에서 150m 우상측(右上側)에 있다. 1995년에 건립(建立)되었는데 본당(本堂)이 17.15평, 삼문(三門)이 7.18평, 담장 90m이며 부지(敷地)는 500여평이다.


동상은 승려이고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사(萬海 韓龍雲 禪師)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동상(銅像)인데 홍성읍 남장리(洪城邑 南長里) 언덕에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 동상건립추진위원회(銅像建立推進委員會)가 주관이 되어 1985년 12월 2일 준공되었다. 2,745평의 부지에 3.2m 높이에 조국의 행복, 승려, 시인임을 상징하는 3개 날개 그리고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임을 나타내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동상 면우측에는 《님의침묵(沈默)》 그리고 좌측면에는 독자(讀者)에게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선생의 생가(生家)이다. 집은 심우재(尋牛齋)와 전대법윤(轉大法輪)으로 되어 있고 앞의 게시판(揭示板)은 생가의 설명 그리고 옆의 표석(表石)은 생가지 기념물 표시이다. 선생은 고종(高宗) 16년(1879) 8월 29일 도사 응준(都事 應俊)의 둘째 아들로 이곳 성곡리 박철동(城谷里 박鐵洞)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힘쓰고 불교문화(佛敎文化)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웠던 애국자(愛國者)의 생가를 성역화(聖域化)하기 위하여 1992년 3월 6일 복원(復元)하였다. 충청남도 기념물 (忠淸南道 記念物) 제75호로 1992년 3월 6일 지정되었다.

 
선생은 1933년 성북동(城北洞)222-1번지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다. 남향(南向)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마주보게 된다고 하여 북향(北向)으로 지었다.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이곳에서 66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심우장에는 약간의 유물(遺物)이 있고 딸(英淑)과 사위 정택근(鄭宅根)의 집은 좌편에 있는데 이들이 심우장을 관리하고 있다.본당(本堂)은 17평이고 부지면적(敷地面積)은 113평이다. 심우장은 서울시 기념물(記念物) 제7호이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면서 국내 · 국외를 막론하고 저지운동이 일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낭독하기로 하고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글을 맡았다. 드디어 3월 1일 33인의 이름으로 오후 2시 종로(鍾路)의 인사동 명월관(仁寺洞 明月館)에서 한용운(韓龍雲)의 낭독으로 선언(宣言)되었다. 이로써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되고 특히 탑골공원에서의 함성은 컸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1980년 독립선언서탑(獨立宣言書塔)을 세웠다.
33인의 서명자를 보면

서명자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억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선생의 불교사상(佛敎思想)과 그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그리고 시인(詩人)임을 기리기 위해 용운당만해대선사비건립추진위원회(龍雲堂萬海大禪師碑建立推進委員會) 위원장 김경봉(委員長 金鏡峰) 외 여러분이 1967년 10월에 유서(由緖)깊은 탑골공원 후문편에 세웠다.
3 · 1절 78주년을 맞아 중랑구청(中浪區廳)에서는 선생이 33인의 한분으로 망우묘지(忘憂墓地)에 안장(安葬)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7년 2월말 선생의 묘하(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에 연보비(年譜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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