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찰방공 한여경(察訪公 韓汝璟 : 中宗 39年(1544)∼宣祖 30年(1597) 19世)
 공(公)은 선조(宣祖) 무신이며 의인(義人)이다. 휘(諱)는 여경(汝璟)이요 자(字)는 중진(仲珍)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참봉공 세빈(參奉公 世빈)의 아들이며 참의공 겸(參議公 謙)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유인 신천 강씨(孺人信川康氏)로 내금위장 응복(內禁衛將 應福)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39년(1544) 생이며 선조(宣祖)때 내금위 찰방(內禁衛 察訪 : 조선조 세조(世祖)말년에 설치한 군대의 一種으로 主로 宮內의 경비를 맡아보았으며 이 기구 안에 중종 30년(1535) 찰방(察訪)을 두어 외직(外職)으로 마정(馬政)을 맡아 보았다.)을 지냈다.
선조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때나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때 6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수성(守城) 하였으나 왜병(倭兵)의 습격을 받아 교전(交戰)중 외원(外援)은 전혀 없게 되니 병력이 부족하여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하였다. 이는 10월 18일이었다. 배위(配位) 숙인 함평 이씨(淑人咸平李氏)는 부사맹 구영(副司猛 九榮)의 따님인데 어느날 흉보(凶報)를 듣고 기절하여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고 절하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 하였으니 나 또한 남편을 따르리라” 하고 곧 바로 시신(屍身)곁으로 달려가 예(禮) 대로 염(殮)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순절하였으니 세인(世人)들이 감탄하였고 충신(忠臣)과 열녀(烈女)의 미거(美擧)는 청사(靑史)에 남으리, 아들은 고(固)이다.
공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순절(殉節)하니 영광읍 연성리 제봉산 계좌(靈光邑 連城里 祭奉山 癸坐) 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배 숙인 함평이씨(配淑人 咸平李氏)와 합조(合兆)로 안장(安葬)되었다.
공의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에 없어지니 함평 노민표 찬(咸平 魯玟杓 撰, 완산 이용연 서(完山 李龍淵 書), 진산 강경원 전(晉山 姜瓊遠 篆)으로 1964년 여름 개수(改竪)하였다. 공이 정유재란(丁酉再亂.1597) 때 수성(守城) 하다 순절(殉節) 하니 이를 기리기 위해 1965년 무룡리에 수성비(守城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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