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록(忠節錄)

 
시정공 한계상(寺正公 韓繼常 : ?∼?,  16世)
 공(公)은 조선 선조(宣祖)때 의병(義兵)이다. 휘(諱)는 계상(繼常)이며 자(字)는 상지(常之)이며, 부사공 희(府使公 曦)의 아들이고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연안 이씨(淑夫人 延安 李氏)로 참찬 숭원(參贊 崇元)의 따님이다.
공은 천성(天性)이 강개(慷慨)하고 지략(志略)이 있었고 궁마(弓馬)를 좋아하였다. 음사(蔭仕)로 현종(顯宗) 15년(1674) 2월14일 증 사복시 정(贈 司僕寺 正)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때 금산(錦山)싸움이 처참(悽慘) 하였을 때 분연히 적개심(敵愾心)을 일으켜 여러 읍(邑)에서 격문(檄文)을 띄워 식량을 모으고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흥덕(興德)으로 나아가 야수 채홍국(蔡弘國)과 함께 금산(錦山)의 산졸(散卒)을 수습(收拾)하고 군사(軍士) 300여인을 거느리고 남당(南塘)에 이르러 피로써 맹서(盟誓) 하고는 흥덕(興德)에 유진(留陳) 하여 방비(防備) 하니 7,8읍이 힘입어 온전(穩全) 하였다.
이듬해 화의(和議)됨을 듣고 통곡(痛哭)하여 파병(罷兵)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에 남원성(南原城)이 함락(陷落) 됨에 공이 채공(蔡公)과 같이 옛날 군사를 초집(招集) 하여 호벌치(伐筏峙)에서 대진(對陣) 하여 각축전(角逐戰)을 하기 수일 전에 제장(諸將)이 많이 죽으니 분개(奮愾)하여 나아가 싸워 수십 창상(槍像)을 입으니 채·고공(蔡·高公)이 떠메고 귀가(歸家)하였으나 순절(殉節) 하였다. 흥덕모충사(興德慕忠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배위(配位) 증 숙인 안동 김씨(贈 淑人 安東 金氏)는 부사 성동(府使 誠童)의 따님이고 아들은 대호군 축(大護軍 軸), 참찬관 복(參贊官 輹), 정략장군 번(定略將軍 번) 이다. 공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창상(槍傷)으로 집에서 순절(殉節)하니 삼개면 어은리 선영자좌(三溪面 漁隱里 先塋 子坐)에 장사 (葬事)하였는데 묘비(墓碑)는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이 찬(撰)하여 세웠다. 공의 배 증 숙인 안동 김씨(配位 贈 淑人 安東 金氏)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후포등자리 자좌(大旺面 後浦登子里 子坐)에 홀로 안장(安葬)되었다. 석의(石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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