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 한세환(恭簡公 韓世桓 : 성종 2년(1471)~중종 17년(1522) 16世)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공서(公瑞), 첨정공, 증 판서(僉正公 贈 判書 : 運)의 아들로 첨정공 증 판서(僉正公 贈 判書 : 致元)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예안 이씨(禮安 李氏)는 찰방공 신(察訪公 愼)의 따님이다.
성종 23년(1492) 사마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년(149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연산군 5년(1499)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천추사(千秋使)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도정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이 심해지자 바른 말을 자주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승진하지 못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중종 2년(1507)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 이조참의가 되었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때 도내에는 흉년이 들어서 많은 도민이 아사(餓死 : 굶주려 죽음) 지경에 있는지라 공은 국가의 곡식을 풀어 이재민(罹災民) 구호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전부 소생(蘇生)케 하였다. 그 뒤 한성부 우윤,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돈녕부사, 경상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좌참찬 겸 지춘추관사,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재임시부터 정무에 지나치게 노고(勞苦 : 애쓰고 고생함)한 것이 병이 되어 병세가 위중하자 왕은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였으나 끝내 회춘(回春)하지 못하고 돌아가니 향년 52세이다. 왕은 2일간의 조회를 철폐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한 뒤 시호를 공간(恭簡)이라 내렸다. 공은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고 겸손(謙遜)하여 평생에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고 벼슬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느 사람이든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사랑하고 공경(恭敬)하였다.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기여 조석문안(朝夕問安 : 아침, 저녁으로 안부를 여쭘)을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막(廬幕 : 상제가 무덤 근처에 거처하는 오두막집) 살이를 하며 집상(執喪 : 부모의 상사에 있어서 예절을 지킴)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 이씨(慶州 李氏)니 전직공 영령(殿直公 : 永齡)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니 큰 아들은 전부공(典簿公 : 헌)이요 차는 참판공(參判公 : 두)이다.
 
所在地 : 楊州郡 長興面 三上里山 59-1
歲享日:陰 10月 3日.
 
번호     이 름 조회
1 한세환 2478
2 한충신 2602
3 한광수 2670
4 한충상 2780
5 한충례 2812
6 한호문 2917
7 한계복 2998
8 한충지 3031
9 한치례 3054
10 한위 3070
11 한충순 3075
12 한전 3081
13 한광조 3122
14 한치원 3126
15 한용탁 3384
16 한휴 3475
17 한후기 3483
18 한사직 3531
19 한광회 3549
20 한인급 3566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