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공 한용탁(靖獻公 韓用鐸 : 영조 35년(1759)~순조 17년(1817) 27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로(汝路), 호는 단산(丹山), 대흥공 증 판서 중유(大興公 贈 判書 重裕)의 아들로 충정공(忠貞公 : 光肇)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금안군 성원(錦安君 成源)의 따님이다.
정조 13년(178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듬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동왕 15년 충청도 도사(都事)로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과장(科場)에서의 난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罷職)되었다. 동왕 17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복직되어 이듬 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곧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재정을 확충할 것과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는지 두루 살팔 것을 왕에게 진언하였다. 동왕 22년 홍문관 응교(應敎)로서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순조 즉위년(1800) 가선(嘉善)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듬 해 경상도 창원, 하동 등지에서 괴서(怪書)를 쓴 범인과 그 관련자에 대한 처리의 임무를 맡아 안핵사(按핵使)로 나갔다. 이듬 해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전일에 안핵사로 나갔던 그가 관찰사 휘하의 수령으로 임명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우의정 서용보(右議政 徐龍輔)의 주장에 따라 취소되고 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로 임명되었다. 때마침 기근이 혹심하였으나 공의 노력으로 많은 기민을 구제하였다. 동왕 4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 해 예조참판에 이어 다시 이조참판을 거쳐 동왕 6년 공조판서, 형조판서가 되었다.그 당시 맹인으로 사형수가 된 김대성(金大成)이 폐질인임을 들어 감형(減刑)할 것을 진언하여 유배(流配)하게 하였다. 동왕 9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나갔다가 동왕11년 황해도 관찰사로 옮겼다. 동왕 13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0월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동왕 14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 해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 다시 대사헌 등을 역임 하였다. 동왕 16년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임지에서 별세하니 왕은 부음(訃音)을 듣고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하고 시호(論號)를 정헌(靖獻)이라 내렸다. 공은 정조 17년(1793) 양절공(襄節公 : 確)의 신도비 대석(神道碑 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발기인 중의 한 분이고 순조 4년(1804) 사숙공묘소중심수호(思肅公墓所重尋守護)할때도 발기인 중의 한분이며 사숙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전(篆)하는 등 위선사에 지성을 다하였다.
배위 증 정부인 기계 유씨(贈 貞夫人 杞溪 兪氏)는 목사공(牧使公 : 漢敦)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생하니 아들 우서공(羽瑞公 : 鴻履)은 여민공(汝民公 : 用錫)에게 계후입양되었고 동지돈녕공(同知敦寧公 : 鵬履)을 계후입양(入養)하였다. 계배 정 부인 남양 홍씨는 정명(鼎明)의 따님인데 자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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