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몽당공 한흥리(夢堂公 韓興履 : 1897∼1979 )
공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아명(兒名)은 정봉(丁鳳), 자는 항길(恒吉), 호는 몽당(夢堂)이다. 경극공 용익(敬極公 用翼)의 장남이요 주원공(周元公 : 積裕)의 손자이며 장도공 치의(章悼公 致義)의 14대손이고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이니 운회(雲會)의 따님이다. 공은 소년시절부터 일본 헌병의 행포(行暴 : 난폭한 행위)와 일본인 학생들이 우리나라 여학생 및 부녀자들에 대한 만행(蠻行 : 야만적인 행동)을 보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敵愾心 : 의분을 느껴 적과 싸우고자 하는 성낸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하여 1919년 22살 때 탑골공원에서 거사한 기미독립선언식(己未獨立宣言式)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시흥역 안양역 군포역 등지에서 선언문을 배부하고 이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여 만세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학생만세운동에 자기 반 학생을 인솔하여 서울역에 집결해 시가행진을 하다가 연행되어 1921년 2월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당하였다.
출감후 4월에 교원양성소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경성 법정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보인학교(輔仁學校 : 현 보인상고) 교원으로 임명되어 1929년까지 근무하였다. 그뒤 경성 매일신문사 기자와 조선연초회사 직원 등으로 근무하였다. 해방 후 영구적(永久的)인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위해서는 인재양성(人材養成)과 자립경제(自立經濟)가 절대적(絶對的)이라 생각하고 1947년 공민학교, 1958년 공업중학교, 1961년 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립하고 1978년에 학교법인 한길학원(韓吉學院)을 설립하여 부천전문대학을 개교한 후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여 우리나라 공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1948. 8. 15 정부수립기념식에서 효자와 선행자 표창을 받았고 부천시 종친회 초대회장으로 종사에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1979년 향년 83에 작고하니 독립투사요 교육자이며 부천시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어 부천시민장(富川市民葬)으로 안장(安葬)하였다.
 1997년 8월 15일에 중국 산동성 위해대학과 유가재씨가 중국 백설옥(白雪玉〓雪花白. 매쉬에위)으로 제작한 220센치 크기 몽당공의 입상(立橡)을 기증하다. 배위는 세분이다. 초배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인데 익수(益壽)의 따님으로 아들 영교(英敎)가 있고 계배는 평양 조씨(平壞 趙氏)이니 종현(宗顯)의 따님으로 아들 창교(昌敎)가 있으며 삼배는 부안 임씨(扶安 林氏)이니 종편(鍾冕)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을 생육(生育)하니 장남 방교(方敎)는 부천전문대학장이고 차남 화교(化敎)는 소사공고 교장으로 국민훈장을 받았으며 삼남 세교(世敎)는 중등학교사로서 국민훈장을 받았고 사남 인교(仁敎)와 오남 원교(元敎)는 미국으로 이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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