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한상호(韓相浩 : 1899∼1921)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경성 출신. 일찍이 간도에서 성장하여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한 뒤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 교원으로 봉직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간도에서 윤준희(尹俊熙) · 임국정(林國禎) · 최이붕(崔以鵬) 등과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여 항일독립 운동에 힘썼다. 그뒤 북로군정서(北路軍政暑)의 특파원이 되어 간도 와룡동에서 군자금모금 활동 중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수시로 거액의 현금이 용정(龍井)으로 송금된다는 정보를 입수, 특파대장 윤준희와 특파원 임국정·최이붕 등과 이를 탈취하여 독립군양성과 무기구입자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월 2일 동지이며 이 은행 용정출장소 직원인 전홍섭(全弘燮)으로부터 이달 4, 5일경 현금 15만원이 용정으로 송금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박세웅(朴世雄) · 김준(金俊)을 새로이 포섭하였다.
1월 4일 6명의 대원을 2개조로 나누어 화룡현(和龍縣) 동양리(東陽里)에 매복하여, 현금을 싣고 다가오던 호송순사 구니토모(國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豊)을 사살하고 현금을 탈취하였다. 1월 10일 돈을 분산 소지한 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여 탈취한 자금으로 당시 그곳에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군대로부터 최신식무기를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하였다. 1920년 12월 밀정인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혔고, 최이붕만이 탈주에 성공하였다. 1921년 국내로 압송되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21년 4월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어, 8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윤준희 · 임국정과 함께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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