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좌랑공 한몽일(佐郞公 韓夢逸 : 19세)
공의 휘(諱)는 몽일(夢逸)이요 자는 자진(子眞)이요 호는 봉악(鳳岳)이니 선조 정축(宣祖 丁丑 : 1577)에 태어났다. 고위(高位)는 응(應)이요 조고(祖考)는 여준(汝俊)으로 돈암공 후(돈菴公 後)이다. 인조 갑자(仁祖 甲子 : 1624)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형조좌랑(形曹佐郞)을 거쳐 단성(丹城), 고령(古靈), 영춘(永春) 등 세고을 수령(守令)으로 청백(淸白) 봉공(奉公) 하였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힘써 정한강(鄭寒岡 : 諱 述)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 고제자(高弟子)가 되니 그 문하생들의 선망(羨望)이었다. 공이 영춘(永春) 고을살이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후학(後學) 양성(楊成)에 힘쓰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적병에게 압박당함을 보고 행제소(行在所 : 임금이 일시 머무르던 곳)로 달려가 임금에게 문안드렸다는 기록을 판서(判書) 정세규(鄭世規)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인조 을유(仁祖 乙酉 : 1645)에 수(壽) 69하고 타계 하였다. 공의 배위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판관 정국(判官 鄭國)의 따님으로 공과 합조(合兆)이다. 공의 세 읍(三邑 : 세고을)을 다스리는데 청백으로 봉공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청덕(淸德)을 기리기 위해 기적비(紀績碑)를 세웠다. 아들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 시중(時重)이다. 공이 지방수령(地方守令)으로 재임할 때 청렴(淸廉)하게 다스린 공(功)을 기려 주민들이 공의 청덕(淸德)을 칭송하는 송덕비(頌德碑)를 산청(山淸) 노변(路邊)에 세웠다.
묘 : 충북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 선녀동 선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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