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청흥군 한수원(淸興君 韓壽遠 : 宣祖 35年(1602) ∼ 顯宗 10年(1669) 21世)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효자로 자는 자구(子耉), 청녕군 덕급(淸寧君:德及)의 아들로 충정공 응인(忠靖公 應寅)의 손자이며 어머니 정부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사계 김장생(沙溪 : 金長生)의 따님이다.
 신독재(愼獨齋 : 金集)의 문인 으로 인조 11년(1633)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동료 들과 함께 율곡(栗谷 : 李耳)과 우계(牛溪 : 成渾)를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配享)할 것을 여러 번에 걸쳐 상소 하였으나 윤허(允許 : 임금의허가)를 받지 못하자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응시하지 않았다. 그 뒤 강릉(康陵)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4년간이나 충청도에 은거 하였다.
 동왕 18년(1640)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음보로 사산감역, 감찰, 정랑, 예산현감, 의금부도사, 사도시주부, 종묘서령, 안성군수 등을 역임 하였고 강화부경역으로 있을 때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도와 강화를 요새화 하는데 노력 하였다. 그 뒤 조부인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應寅)의 작위를 이어 받어 청흥군(淸興君) 에 습봉(襲封)되었고 이천부사, 한성부서윤,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상주목사 때 임지에서 작고 하니 향년68이다. 공은 수령으로 있을 때 임지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과 칭송이 자자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바 있고 경종(景宗)때 손자(諱 配夏)의 현달(顯達)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50년간이나 양친(兩親)을 섬기는데 부모의 뜻에 따라 순종(順從) 하여 심신(心身)을 편안히 하여 드리고 절기에 맞는 의복과 구미(口味)에 맞는 음식을 언제나 소홀(疏忽)함이 없이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으며 청녕군이 안질(眼疾 : 눈병)로 심사(心事)가 안정되지 못하고 무료하게 지내므로 공은 온종일이라도 그 측근에서 떠나지 않고 악기(樂器)를 울리며 노래를 부르거나 장기나 바둑 또는 웃음거리 이야기 등을 그 앞에 늘어 놓아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노력하였고 또는 평소에 친애하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주식(酒食)을 대접하며 연일(連日) 놀다 가도록 하였다.
 현종 1년(1660)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이듬해 거듭 모친상(母親喪)을 당하니 전후상기(前後喪期)가 4년인 장시일(長時日)에 여막(廬幕)에서 거처하면서도 단 한번이라도 내당(內堂)에 들러본 일이 없었다.
 명재(明齋 : 尹拯)찬 행장(行狀)과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찬 병서의 묘갈(墓碣)이 있다.
 배위는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 李氏)니 처사공 영원(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슬하에 7남 2녀를 생육하니 장남은 청원군(淸原君 : 聖輔)요, 2남은 판관공(判官公 : 聖翼) 증 이조판서이며, 4남은 참판공(參判公 : 聖佑) 증 이조판서 대제학이고, 5남은 생원공(生員公 : 聖佐) 증 사복시정이며, 6남은 증 참판공 성량(贈 參判公 : 聖亮)이고 부실에서 성비(聖비)가 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찬(撰)하고 또 비문(碑文)도 썼으며 대제학 김만중(大堤學 金萬重)이 전자(篆字)를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세웠다. 그리고 이 묘갈(墓碣)은 타(他) 묘갈보다 특이(特異)하다.
 비신(碑身)은 198Cm로 형태(形態)는 정사각형(正四角形)이다.
 현종(顯宗) 1년(1660)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재직중에 부친상(父親喪)으로 인하여 사직하니 백성(百姓)들이 석별(惜別)의 정(情)을 잊지 못하고 추렴(出斂)하여 부사한공수원무(府使韓公壽遠撫) 라고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恩德)을 칭송(稱頌)하였다.
 3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천 설봉수원지 옆에 우뚝 서 있다.
 位置 : 京畿道 華城郡 飛鳳面 三花里
 歲享日 : 陰 10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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