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공(思肅公)

 
사숙공  한  악(思肅公 韓 渥 : 원종 15년(1274)~충혜왕 3년(1342) 9世)

공은 고려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왕조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악(渥)이요 자(字)는 자포(子布)요 호(號)는 성재(誠齋)또는 적선문(積善門 : 門下生이 지어준 號)이다.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사기(謝奇)의 아들이요 첨의중찬(僉議中贊)문혜공(文惠公) 강(康)의 손자이다. 公은 고려 원종(元宗) 15년(1274)에 탄생한 명문 출신으로 몇년 있다가 충렬왕(忠烈王) 5년(1279) 3월에 독로화(禿魯花 : 두루아치란 蒙古語로 元來 人質로 고려에서는 人質로 간 王子와 高官의 子弟를 가리켰다)로 부(父) 사기(謝奇)가 뽑혀 원에 가족을 거느리고 대방공(帶方公) 징(徵)을 따라가는데 아들 악(渥)과 영(泳), 준(浚)을 데리고 갔다. 여러 해 머물다 영(泳)만을 천자(天子)가 거주하는 경사(京師)에 맡겨놓고 가족이 환국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현관(顯官)을 역임(歷任)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 9월에 우대언(右代言)이 되고 밀직사 좌승지(密直司 左承旨)를 거쳐 충숙왕(忠肅王) 7년(1320) 12월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월 지밀직사자(知密直司事)로 삼고 4월 왕이 원나라에 가는데 사경(四更 : 새벽 2시경)에 양선문(陽善門)으로 나갔으므로 조정의 관원들은 전송 못하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오 잠(吳 潛)과 公 등 대신만 몇 데리고 갔다. 당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왕(瀋王) 고(暠)가 분수밖의 욕망으로 허위로 여러 가지 트집을 꾸며 괴롭히므로 公이 그 장소에 꼭 지켜서서 일행(一行)을 안심케 하고 동행대신(同行大臣)들과 함께 성심성의(誠心誠意)로 보호하고 기발(奇拔)한 계략(計略)으로 왕에 미치는 위급한 화난(禍難)을 막아냈다. 원나라에서 돌아와 10월 公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았다. 동왕 11년(1324) 3월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마음을 두 가지로 갖는 것은 나의 신하가 아니다. 3품(品) 치사(致仕) 이상으로서 원나라 서울에 글을 올려 심왕 고(暠)를 세울 것을 청한 자는 모두 녹봉(綠俸)을 정지하라”하였다. 왕이 보낸 찬성사(贊成事)인 公이 와서 노자(路資)로 쌀과 베(布)를 거뒀다. 동왕 14년(1327) 11월 무자(戊子)에 교(敎)하기를 “과인(寡人)이 재도(在都 : 元) 5년에 간신(奸臣)이 국조(國祚 : 位)를 옮기려고 꾀하는데 시종(侍從)한 신하들이 절(節)을 다하여 보좌(輔佐)하기를 시종(始終) 한 마음으로 하였으니 그 공(功)을 가히 채록(采錄)할만 하도다”하고 첨의정승(僉議政丞) 윤 석(尹 碩), 상당군(上黨君)인 公 등 30여명에게 일등공신(-等功臣)을 찬성사(贊成事) 정방길(鄭方吉), 검교판서(檢校判書) 한 영(韓 泳) 등 50여명에게 이등공신(二等功臣)을 삼고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주고 부모 처자에게도 작(爵)을 사(賜)하되 차등(差等)있게 하였다.

思蕭公(諱 渥) 祭壇

그리고 철권(鐵券 : 天子가 功臣에게 주는 割付의 一種)에 기록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으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封)하고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에 서훈(敍勳)되었다. 충혜왕 즉위년(忠惠王 卽位年 1330) 4월 삼사사(三司使)로 삼았으며 이듬 해 중찬 (中贊)으로 삼았다. 충숙왕 복위 8년(1339) 왕위(王位)의 계서(繼序)가 있을 때 또 다시 간모배(奸媒輩)의 소란(騷亂)이 있었으므로 公은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중신(衆臣)들을 거느리고 계략(計略)을 책정(策定)하여 국난(國難)을 극복(克服)하였으며 충혜왕 복위 1년(1340) 4월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에 올랐다. 公은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고 만년(晩年)에 관직에서 물러나 사저(私邸)에서 동왕 3년(1342) 69세로 졸하니 시호(諡號)를 사숙(思肅)이라 하였으며 충목왕(忠穆王) 2년(1346) 5월 대행왕(大行王)을 대묘(大廟)에 부제(부祭)하고 정승(政丞)인 公과 참리(參理) 이규(李揆)를 배향(配享)하였다. 천성(天性)이 근엄(謹嚴)하고 신중(愼重)하며 대인(大人)으로서의 기량(器量)이 있어 매사를 반드시 세번 생각하여본 연후(然後)에야 시행(施行)하였고 몽고어(蒙古語), 한어(漢語)에도 능통(能通)하였고 시(詩)에도 능(能)하였다. 배위(配位)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卞韓國大夫人 原州 元氏)는 밀직사사 경(密直司事 卿)의 따님이고 후배(後配) 송씨(宋氏)는 정윤(正尹)의 따님이다. 아들은 일곱인데 첨의공 대순(僉議公 大淳),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 계성군 중례(繼城君 仲禮), 정당공 공연(政堂公 公衍), 서원군 방신(西原君 方信), 학사공 공서(學士公 公瑞), 평정공 방도(平靖公 方道)이다.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 공묘(公墓)에 옛 비석(碑石)이 있었으나 모두 자획(字劃)이 훼손되었으므로 순조(純祖) 8년(1808) 8월 후손(後孫) 이조판서 만유(吏曹判書 晩裕)가 짓고 좌의정 용구(左議政 用龜) 서(書)로 개수(改竪)하기에 이르렀는데 명(銘)에 이르기를「위대(偉大)하신 사숙공(思肅公)은 고려조(高麗朝)의 명신(名臣)일쎄. 이 세상(世上)을 다스리어 문물(文物)이 빈빈(彬彬)하오. 연경(燕京)의 사지(死地)에서 왕(王)의 화(禍)를 막아내니 범의 꼬리 밟고 넘어 인각(麟閣)에 공(功) 세웠네. 님을 위(爲)한 일편단심(一片丹心) 거듭거듭 수훈(殊勳)일쎄. 군국(君國)에는 진충(盡忠)하고 만민(萬民)에게 시혜(施惠)로다. 남긴 풍도(風度) 오래건만 아직까지 새로워라. 성녀(聖女)도 탄육(誕育)하고 현량재상(賢良宰相) 많이 낳네. 의연(依然)한 저 묘소(墓所)는 오백년(五百年)이 되었는데 빗돌에 글을 새겨 천년만년(千年萬年) 전(傳)하리라」하였다. 公은 충혜왕 3년(1342) 69세로 졸하니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세곡(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細谷) 유좌묘향(酉坐卯向)에 배위, 변한국대부인원주원씨(配位卞韓國大夫人原州元氏)와 후배, 송씨(後配宋氏)의 삼합조(三合兆)로 안장되었다. 자손들이 늘 봉사(奉祀)하여 왔으나 1950년 6·25전란으로 휴전선 완충지대(休戰線 緩衝地帶)에 놓이게 되니 성묘(省墓)길이 막혀 1988년 이곳 고양시 내유동 대내산하(高陽市 奈遊洞 大奈山下)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思蕭公(諱渥)壇碑

思蕭公(諱 渥)壇碑 단비의 전면(前面)은 高麗右政丞諡思肅韓公渥之壇 配 卞韓國大夫人原州元氏 配宋氏合設 “고려우정승시사숙한공악지단. 배변한국대부원주원씨 배송씨 합설”0|다. 세향일 음력 4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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